서귀포시에 위치한 다자요 ‘도순돌담집’. 집 주변의 귤나무가 현대적 디자인과 조화를 이룬다. 사진 김지욱 인턴기자
서귀포시에 위치한 다자요 ‘도순돌담집’. 집 주변의 귤나무가 현대적 디자인과 조화를 이룬다. 사진 김지욱 인턴기자

“서치비 자래 와수가? 거기 좋수다. 겅허믄 잘 놀당 갑써(“서씨네 집에 자러 왔어요? 거기 좋아요. 그럼 잘 놀다 가세요”의 제주도 방언).”

10월 18일 제주 서귀포시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최종 목적지가 ‘도순돌담집’이라 하니 어르신은 이같이 반갑게 맞이해줬다. 도순돌담집은 10여 년간 도순마을에 방치돼 있던 빈집이었지만, 재작년 농어촌 빈집 재생 숙박 업체 ‘다자요’의 손을 거쳐 숙박 시설로 재탄생했다.

낮은 돌담 안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돌담집은 앞마당의 귤나무와 함께 제주 고택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문 옆에 ‘귤을 딸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어 있으니, 마을 슈퍼마켓에서 박스만 사면 귤을 담아 집으로 보낼 수 있다’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마음이 앞서 박스를 네 개나 샀지만, 생각보다 귤 따기 작업이 힘들어서 한 박스밖에 채우지 못했다.

사랑방과 온돌바닥이 떠오르는 외관과 달리, 실내는 현대적인 감성으로 리모델링돼 있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애월읍산 동물복지유정란으로 음식을 만들고, 한라봉 향이 나는 욕실용품을 사용하니 제주도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불편함을 못 느끼며 지내던 찰나, 천장에 머리를 찧으며 층고가 낮은 고택임을 몸소 확인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이인호 청년회장은 “다른 마을이 난개발로 제 모습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숙박업소가 들어온다고 했을 때 걱정이 많았다”며 “오히려 지금은 마을과도 잘 어울리고 흉물 같던 빈집에 활력이 생긴 것 같아 마을 사람들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기만 한 이 집은 사실 신산업과 기존 산업 간의 치열한 갈등을 봉합한 결과물이다.

다자요는 농어촌의 빈집을 장기 임대해 리모델링을 거쳐 숙박업을 운영하고, 소유주에게 집을 돌려주는 빈집 재생 숙박 업체다. 2017년 다자요는 와디즈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제주도 내에서 거주인이 떠난 빈집 네 채를 임대했다. 리모델링을 거쳐 완공 이후에는 77%의 가동률을 보이며 농어촌 빈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다자요는 어떻게 살아났나

순항하던 다자요는 지난해 7월 사업이 중지됐다. 거주인이 없는 운영 형태가 ‘농어촌 민박의 경우 해당 주택에 거주하는 농어민만 숙박업을 할 수 있다’는 현행법에 전면으로 대치된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사업권 침해를 걱정하는 기존 민박 업계와 주거 환경 훼손을 경계하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던 올해 6월, 정부의 ‘한걸음 모델’ 대상으로 다자요가 선정되면서 갈등 해결의 교두보가 마련됐다.

한걸음 모델은 정부가 신사업을 도입할 때 이해 관계자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하는 일종의 타협 절차다. 한걸음 모델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빠른 속도’를 우선시한다. 결국 3개월간 상생 조정 기구를 통한 여러 차례의 해커톤(한정된 시간 내 결과물을 완성하는 논의 방식) 끝에, 정부는 기존 민박 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 및 컨설팅에 예산을 지원하고, 다자요는 매출액 일부를 마을 기금으로 조성해 마을 주민과 나누는 등의 타협점을 도출했다. 그 결과 9월 23일 ‘규제 샌드박스 실증 특례’를 통해 농어촌 빈집 개발 프로젝트가 ‘5개 지자체, 50채 이하, 300일 이내’라는 조건으로 시범 사업 시행이 확정됐다.

유무학 농어촌민박협회 이사는 “계속 만나니 합의점이 생겼다”며 “정부가 무조건 새로운 것만 들여오려 하지 말고 기존 사업자들에게도 실질적인 보상을 줘야 상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남성준 다자요 대표는 “저예산의 스타트업 특성상 산업 간 충돌에서 신속한 해결이 중요하다”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겨우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는데, 이 악물고 버텨낸 보람이 있다”고 했다.

한정적으로 규제가 풀리자 사업에 속도가 붙었다. 농어촌 빈집 개발 프로젝트 시범 사업 가능 지자체가 5개로 제한되자, 오히려 빈집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지자체들이 다자요에 손을 내밀었다. 장충남 남해군수는 10월 17일 다자요와 간담회 자리에서 “현재 남해군에 950여 채의 빈집이 있는데, 청년들이 현지화한 숙박 경험을 통해 우리 군을 느끼고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했다.

주민들의 입장도 변하고 있다. 다자요와 사업 논의가 진행 중인 남해군 고현면 관당마을에서 만난 정현일 관당마을 이장은 “빈집이 많이 생긴 상황에서 다자요 프로젝트가 우리 마을에 피해가 되지 않는 좋은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했다.


남해군 고현면에 있는 관당마을에서 마을 이장, 다자요 대표, 군청 관계자(왼쪽부터)가 빈 집을 보며 사업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사진 김지욱 인턴기자
남해군 고현면에 있는 관당마을에서 마을 이장, 다자요 대표, 군청 관계자(왼쪽부터)가 빈 집을 보며 사업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사진 김지욱 인턴기자

한걸음 모델 미봉책에 불과…아쉬움 남아

지금껏 신산업은 기존 산업과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거나 관련 법안이 없다는 이유로 좌초됐다. 대표적인 게 승차 공유 플랫폼 ‘타다’다. 쏘카와 VCNC가 운영하는 ‘타다(신산업)’는 운송 서비스의 혁신 모델로 등장했지만, 택시 업계(기존 산업) 반발로 관련 법안까지 개정된 끝에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정부가 낡은 규제로 서비스 혁신을 막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정부는 지난해부터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했다. 규제 샌드박스는 신산업을 자유롭게 테스트할 수 있도록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규제를 풀어주는 제도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정부가 임의로 현행법안과 기존 산업 종사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신산업을 도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정부는 한걸음 모델을 만들어 이런 딜레마를 풀고자 했다. 이번 합의안은 한걸음 모델의 첫 성공 사례다.

다만 이러한 노력에도 한걸음 모델의 성과가 미흡하다는 목소리가 있다. 올해 2월 관계 장관회의 때부터 홍남기 부총리가 신구산업 간 갈등 해결의 대안으로 한걸음 모델을 제시했던 것에 비해 제도 구체화 시점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걸음 모델로 함께 논의됐던 ‘도심 공유 숙박’과 ‘산림 관광’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한걸음 모델이 다자요 사례 외에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타다로 불거진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걸음 모델 역시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무조정실의 ‘규제 샌드박스 신청 관련 통계’에 따르면 현재 승인된 규제 샌드박스 중 실증 특례(법규 개정이 의무화되지 않은 형태)가 83%에 달한다. 한걸음 모델 역시 이와 같은 ‘단기 계약서’에 그치지 않으려면, 실증 특례가 법규 개정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일본도 유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주택숙박사업법’을 제정해 2018년부터 시행 중이다. 농어촌민박협회 관계자는 “자칫하면 다자요 모델이 지역 민박업 생태계를 해치고 투기를 양산할 수 있기에, 시범 사업 경과를 살펴 법률 개정 시에는 원천 불가의 입장에서 모두 다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다자요의 ‘마을 기금’, 타다의 ‘기여금’처럼 모든 신산업 종사자의 기존 산업을 위한 금전적인 지원이 관례화한다면, 스타트업에 또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남성준 다자요 대표는 “다자요는 마을의 기존 인프라를 사용하기 때문에 기금 조성의 이유가 있지만, 과도한 합의안은 신산업의 활동 범위를 제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