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서서히 개헌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당초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지도부는 개헌 논의 시점을 내년 초쯤으로 잡고 있었다. 서울시장,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지방선거가 5월 말로 잡혀 있는 2006년에 개헌 논의를 시작해 가능하면 내년 중 마무리 짓자는 구상이었다. 대신 집권 3년차인 올해는 경제 회복을 비롯한 일하는 한 해로 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같은 여권의 구상이 반년 가까이 앞당겨진 것일까? 여권은 이제 본격적으로 개헌 없이는 불가능한 권력구조나 정치구도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의에 처음 불을 댕긴 사람은 노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6월24일 여권 핵심관계자들의 주례 비공개 미팅이라고 할 수 있는 ‘11인 모임’에 전격 참석했다. 이 모임은 작년 총선 이후 노 대통령이 ‘당정(黨政) 분리’를 선언한  뒤 이에 따른 분권형 국정운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작년 여름 만들어졌다. 여당 지도부와 여당 출신으로 입각한 인사, 청와대 고위 인사 등이 매주 주말 모여서 당정 협조와 국정운영 전반에 걸친 조율 작업을 하는 자리다. 모임 참석 대상은 그때그때 다뤄지는 주제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작년 가을부터 올 초까지는 8인 모임이었다가 최근 정책 협의를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11인 모임으로까지 확대됐다.

 이해찬 총리가 주재하는 방식을 취하며, 여당에서 문희상 의장, 정세균 원내대표, 원혜영 정책위 의장, 정부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정동채 문광부 장관,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과 김병준 정책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조기숙 홍보수석 등이 멤버라고 한다. 총리 공관에서 토요일 오전에 만났으나, 주5일 근무에 맞춰 최근에는 금요일 오후로 시간을 조정했고 천정배 의원이 법무부 장관이 된 후 12인 모임으로 확대됐다는 게 여권 인사들의 설명이다.

 노 대통령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적어도 바깥에는 노 대통령의 참석 사실이 드러나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6월24일 모임 끝 무렵에 노 대통령이 참석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현재 여권의 상황을 ‘비상사태’로 규정 짓고,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법안 통과가 안 된다”며 “한나라당이나 민주노동당, 민주당 등 야당과 연립정부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상황은 한나라당이 전방 감시초소(GP) 총기난사사건 등을 이유로 윤광웅 국방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상정·표결 처리하겠다고 나선 시점이었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 ‘연정(聯政)’ 발언은 처음 열흘간은 공개되지 않았다. 여권 고위관계자들이 늘 “비밀이 없다”며 당정간의 보안의식 부재를 한탄하던 것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열흘 이상 비밀로 남아 있던 대통령의 연정 발언은 결국 한 일간지를 통해 공개됐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노 대통령은 이 보도를 시작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며칠간 연정 발언을 쏟아냈다. 또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청와대 참모들의 지원 사격이 줄을 이었다.

 노 대통령이 연정 문제를 꺼내면서 이제 논의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개헌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물론 여권 어느 인사도 “지금 당장 개헌 문제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며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연정이 됐든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취하고 있는 현재의 권력구조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여권내 기류도 엇갈린다. 문희상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연정 논의가 개헌 쪽으로 확산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문 의장은 지난 7월10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연정 문제를 선거구제 개편으로 제한했다. 선거구당 국회의원 1명을 뽑는 지금의 소(小)선거구제로는 한나라당이 영남, 지금의 여권과 민주당이 호남을 독식하는 지역구도가 변하지 않는 만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거나 영·호남에서 별도로 비례대표를 뽑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이 선거구제만 합의되면 야당에 총리 지명권과 내각제 수준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방안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견은 연정 제안이 한나라당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그러나 ‘문희상식 노 대통령 해석’은 열린우리당 내에서 적잖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을 비롯한 광범위한 연정 논의를 제안했는데, 여당 지도부가 논의의 대상을 선거구제 문제로 제한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의 속내는 뭘까. 현재로선 단정 짓기 힘들지만, 노 대통령이 단지 선거구제 정도 바꾸자고 연정이라는 화두를 던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노 대통령은 우리의 정치 지형, 권력 구조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정치권은 물론 여론주도층, 일반 국민까지 참여하는 대형 논의를 시작하자고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정치권은 개헌 문제를 포함한 대형 논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의중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최근 청와대 쪽에서 “앞으로도 연정 발언에 이어 노 대통령이 후속적 성격을 갖는 발언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작년 총선 이후 국회를 무대로 벌어지는 정당정치에서 한발 물러선 듯한 태도를 보여오던 노 대통령이 다시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까닭은 뭘까. 아무래도 여권의 현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점을 들 수밖에 없다. 현재 노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탄핵 이전과 비슷한 최저점 수준을 맴돌고 있다. 한때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 회자됐던 ‘빅 매치 불패론’도 사라졌다. 여당은 재보선에서 져도 늘 대선이나 총선 같은 큰 승부에선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최근 들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어려운 상황을 연정이나 개헌이라는 대형 승부수로 돌파하려는 게 노 대통령의 뜻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올 가을부터는 이런 류의 정치 공방을 피하기도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