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자동차 메이커 중 하나인 BMW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는 크리스 뱅글 부사장이 ‘2005 서울모터쇼’가 진행중이던 지난 4월말, 한국을 방문했다. 국민대 디자인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난 4월28일 오후,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국민대 디자인센터 지하 세미나실 100여개 좌석은 이미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날 ‘21세기 디자인 경향’이란 주제로 강연에 나선 이는 BMW그룹의 디자인 총책임자 크리스 뱅글. 그는 자동차, 모터사이클, 라이프스타일 액세서리는 물론 MINI와 롤스로이스 등 BMW가 생산하는 모든 제품의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BMW7·6·5 시리즈와 Z4, X3, 그리고 최근 국내에 출시된 뉴3시리즈의 디자인이 그의 손길을 거쳐 탄생했다.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디자인 관계자의 태도도 사뭇 진지했다.

 예정 시간을 조금 넘겨 도착한 그는 차가 “밀리는 바람에 약속 시간에 늦어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곧바로 강연에 들어갔다. 학자풍의 외모에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임을 말해 주듯 정장 수트 차림이 썩 어울렸다. 다음은 강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에릭 걸이란 조각가이자 문자 조형가(Typographer)가 디자인의 미래에 대해 예언한 것이 있다. 미래 디자인은 2개의 세계로 나뉘는데 하나는 기계가 주도하는 산업적 디자인,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수공 디자인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그는 기계가 주도하는 산업적 디자인이 인간적이고 수공적인 디자인을 압도할 것이라고 했다. 대체로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산업화 과정을 통해 기계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현재 단계의 디자인은 ‘소비를 촉구하는 매개체’인 셈이다. ‘과연 디자이너는 소비 촉구에 종사하는 기계인가?’ 하는 고민이 디자이너들이 갖고 있는 주요 과제다.

 디자인에는 패러다임이 있다. 자동차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어떤 패러다임은 매우 오래 가고, 어떤 패러다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동차 디자인의 개념은 집에서 출발했다. 목재가 주요 소재로 쓰였고, 이동성만 주어지면 충분했다.



 디자인은 소비자와 제품을 연결하는 ‘미디어’

 1930년대 이후엔 배라는 개념으로 이동했다. 이동성에 금속 재질이 포함됐다. 이는 위대한 전환이었다. 이후 자동차 개념은 냉장고였다. 공간의 효율적 이용, 극대화가 관건이 된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 변화에 맞추지 않은 메이커는 사라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들은 디자인 부문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제품에 많은 것을 원한다. 마치 자동차가 아이도 낳고 우유도 짜고, 고기도 공급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웃음)

 지금 디자인의 패러다임에서 디자이너는 마술사와 같다. 수백년 동안 마술의 비밀은 엘리트, 즉 소수에만 국한돼 온 극비 사항이었다. 이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한 건 1876년 호프먼 박사였다. 그의 마술 비밀 공개로 마술의 이해는 어른 수준에서 아이들 수준으로 내려왔다. 이는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이런 패러다임을 잘 받아들인 대표적인 인물이 데이비드 카퍼필드다. 그는 새로 바뀐 패러다임을 자신의 것으로 잘 소화했고, 이를 통해 클라우디아 쉬퍼 같은 미인을 품에 넣을 수 있었다.(웃음)

 핵심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대화, 관객의 참여다. 현대의 자동차 디자인도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과 요구를 자동차에 최대한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과감한 도전 절실

 그렇다면 과연 미래 자동차업계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현재를 들여다보면 점점 더 많은 자본의 투자에 비해 효과가 작은 게 사실이다. 결국 이를 극복하는 것은 ‘관객’ 수준을 높여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동차란 상품이 고객, 즉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할 3대 요소로는 ‘개별성·저가·고품질’을 꼽을 수 있다. 나만의 것이란 느낌과 합리적인 가격, 안정성과 성능이 담보된 품질이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는 다양성 시대다. 우린 그 안에 살고 있다.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영감이다. 영감은 어디서 얻는가. 세상의 모든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자, 여기 MP3플레이어 아이팟(i-Pod)이 있다. 아이팟은 워크맨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것과 같은 ‘전혀 새로운’ 제품이다. ‘이 제품이 어떻게 사람들을 매혹시켰을까?’제품을 바라보며 다양한 상상에 빠진다. 이렇듯 나는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영감이 얻어진다.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드는 제품이 너무 사랑스러워 작품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마치 신화 속 피그말리온처럼.

 BMW의 디자인 문화는 한마디로 ‘활발한 대화’다. 우리 주변의 상황은 계속 변화한다. 때론 상황이 도전적이기도 하고,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기도 하다. 우리에게 가장 스트레스가 된 건 1999년이었다. 우리가 2000년대라는,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펼쳐질 지를 알기란 높고 두꺼운 벽을 통해 건너편을 보는 것처럼이나 막연했다. 세기말의 불안함이었던 셈이다.

 우린 그 벽에 구멍을 내고 저쪽 편을 보기로 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뭔가를 제시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어떤 모양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새로운 세기의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6시리즈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두려움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자동차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2002년 BMW 디자인팀은 정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뮌헨의 바이에른왕국 시절 건물을 4개 컬렉션이 주축이 된 박물관으로 꾸민다고 했다. 건축, 사진, 현대미술, 산업 디자인 등 4개 부문이었다. 이 중 산업미술 부문을 우리에게 의뢰해 왔다. 우리에겐 13m 높이의 벽면이 주어졌다. 남은 기간은 3개월이었다. 그 결과물은 자동차 디자인이란 뭔가를 설명하고 선언하는 것이어야 했다. 문제는 여러 가지였다. 이 중에는 작업을 하려면 디자이너 모두가 여름휴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도 포함돼 있었다.(웃음) 그러나 평생 단 한 차례 올까 말까한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우린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엔 시도하지 말고, 할 바엔 제대로 하자면서 여름휴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벽면의 위쪽에 각종 자동차 부품을 넣어 밑에서 보면 마치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했다. 관람자들이 저절로 뒤로 물러서게 되는 느낌을 갖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벽 한가운데를 잘라 빛을 투사했다. 부드러운 자동차의 곡선을 표현한 것이다. 그 불빛은 손으로 만지기엔 높은 곳에 위치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엔 다양한 자동차의 외관을 새겨 넣었다. 관람자들이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위치였다. 균형과 긴장, 그리고 비대칭이 우리가 말하려는 개념이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진실, 현실을 말하고 사랑과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했다. 흔히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서로 갈등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자동차란 ‘현실’을 함께 어떻게 하면 ‘희망’으로 구현하는가 하는 동반자 관계다. 말로는 부족하며 뮌헨에 있는 박물관에 가서 우리가 만든 조형물을 보고 만지고 느끼길 바란다.

 강연이 끝난 후 별도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이미 다음 스케줄이 밀린 상태였지만, 크리스 뱅글씨는 여유를 갖고 질문하라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한국 산업계에도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데, 한국 제품의 디자인 수준은 어떻다고 보는가. 한국 자동차 디자인을 중심으로 말해 달라.

 한마디로 다이내믹하다. 품질과 디자인 측면 모두 훌륭한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다. 매우 역동적이고 무엇보다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품질에 비해 디자인의 독창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차 품질에 대한 이의 제기가 적어진 반면, ‘디자인은 모방이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 독창성이란 어떤 것인가.

 고유의 것, 독창성이란 무척 어려운 부분이다. 먼저 다른 제품의 훌륭한 점을 따르는 게 모방이라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어떤 제품만의 고유의 것을 아이덴티티라고 해도 그것을 배워 오는 건 전혀 문제가 안된다. 당신은 우리의 최초 모델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딕시’라는 모델이었다. 오스틴 세븐이란 회사에서 최초 개발한 것인데, 우리가 라이선스를 주고 샀다. 그게 BMW의 시조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도 오랜 시간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만의 것이 생겨났다. (독창성이란) 이렇듯 하룻밤 사이에 얻어지는 게 아니다. (칠판에 그림을 직접 그리며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최근 우리가 내놓은 ‘7시리즈’의 차량 뒷부분을 이렇게 곡선으로 처리했다. 과연 이게 우리만의 것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린 새로운 모델에 이렇듯 새로운 해석을 한 것뿐이다.



 디자인에 있어 모방이 갖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모방이 쉬운 줄 아는데, 사실 모방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웃음) 어떤 제품을 모방하는 것은 그 디자인이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인데, 이는 디자인을 한 사람에겐 굉장히 좋은 일이다. 만약 어떤 차를 보고 “와, BMW의 어떤 모델과 비슷하네” 한다면 그건 우리가 일을 제대로 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심판관인 소비자 대중들은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소비자들은 다양한 수준에 존재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제품을 판단한다. 형태만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새로운 디자인이 시장에 나오면 긍정, 부정의 시각이 존재한다. 모험적인 디자인 선택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제품별 디자인 변화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다. 동물의 진화가 조금씩 진행되다가 어느 한순간 큰 변화를 맞는 것과 같다. 디자인의 변화는 제품 수명(라이프 사이클)에 맞춰 진행된다. 통상 제품의 디자인에 큰 변화를 주려면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사전에 변화를 위한 전략이 서야 하고, 이를 끝까지 밀고 가는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의 디자인이 최종 결정되는 단계는 어떻게 되는가.

 맨 처음엔 물을 담을 용기의 형태를 결정한다. 컵, 맥주통, 기름통, 욕조…. 모두 물을 담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를 고른다. 이 단계를 ‘이해 수준’이라 부른다. 컵이 결정되면 유리컵, 머그컵 등 여러 가지 컵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과정을 갖게 된다. 이 단계가 ‘믿음 단계’다. 그 다음엔 ‘관찰 단계’로 넘어간다. 확대경으로 한 부분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확대하고 관찰한다. 이 과정만 1년 정도 걸린다. 미세한 조정을 거쳐 결국엔 최종적으로 하나의 디자인만 남게 된다. 결국 하나의 제품에 복수의 디자인이란 BMW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논의됐던 다른 디자인들이 단계를 뛰어넘어 제시되는 일은 절대 없다.



 인터뷰가 끝나고 상견례를 갖는 자리에서 그는 기자가 맨 처음 던졌던 질문이 마음에 걸렸는지 세 차례에 걸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메이커, 소비자 모두에게 하고 싶은 얘기이기도 했다.

 “Think positive! positive! positive!(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긍정적으로!)”

오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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