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석 기업은행 행장(55)은 지난해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않겠다”는 ‘우산론’을 주창한 주인공이다. ‘우산론’은 중소기업이 내수 부진과 유가 급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는 데도 시중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고 안전 자산에만 투자하는 등 쏠림 현상을 빗대서 한 말이다. 은행의 건전성과 수익성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어려울 때 중소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그가 최근 ‘우산론’을 접었다. 취임 1년이 지난 그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5월13일 을지로 기업은행 행장실에서 그의 중소기업 지원 철학과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내수 침체, 유가 급등 등 지난해 중소기업들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당시 ‘우산론’을 주창하면서 커다란 호응을 얻으셨는데요. 그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않겠다”는 ‘우산론’은 일부 은행들의 자금 쏠림 현상이 지나치다는 인식에서 한 말입니다. 중소기업들의 사정이 나빠졌다고 자금 지원을 중단하고 지원했던 자금마저 조기 회수할 경우 중소기업들은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어요. 중소기업 부실은 길게 보면 은행이나 경제 전반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긴 안목으로 중소기업을 바라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지난해 은행권 전체 중소기업 대출 순증액은 5조5000억원 정도에 그쳤다. 내수 침체로 중소기업들의 수익성과 건전성이 악화되자 시중은행들이 대출을 극히 꺼렸기 때문이다. 이 중 기업은행의 대출 비중은 전체의 74%(4조3613억원)에 달했다. 기업은행이 중소기업의 젓줄이란 말이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우산론’을 주창했던 강행장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중소기업 지원에 앞장선 것이다.



 아직도 내수는 크게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중소기업들이 크게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올해에는 ‘우산론’을 접을 생각입니다. ‘우산론’이란 소극적인 방법으론 중소기업 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대신 홈닥터[주치의;主治醫]가 되자고 임직원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예 기업이 비를 맞지 않도록 하자는 거죠. 은행 담당자가 기업의 건강 상태를 매일 체크하고 위험 발생시 예보해 준다면 ‘비오는 날 우산을 빼앗을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또 감기 예방을 위해 독감주사를 맞는 것처럼, 사전에 기업의 질병을 체크함으로써 이를 완치할 수 있도록 예방 조치도 취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올해에는 중소기업 홈닥터 시스템을 갖춰 나가는 데 전력투구할 계획이에요.



 강행장이 1년만에 ‘우산론’을 접고 갑자기 ‘주치의론’을 내세운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지난 4월에 열렸던 지역본부장 영업회의에서의 에피소드다. 영업회의를 주관하던 강행장은 유난히 연체율이 증가한 지역이 있어 해당 본부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연체율이 왜 이렇게 높아졌습니까?” 해당 본부장은 뜨끔했다. 원인에 대한 질책이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잘 나가던 한 중소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부도가 났다”고 본부장이 해명했다. 강행장은 잠시 말을 잊었고, 본부장 역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강행장은 차분하지만 강한 어조로 당시 모여 있던 지역본부장들에게 말했다. “연체율이 높아진 데 대해선 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내 앞에서 ‘어느 날 갑자기’란 말은 하지 마십시오. 거래 기업이 부도가 났는데 사전에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제대로 살림을 하지 못한 기업에도 문제가 있지만, 고객을 철저히 관리하지 못한 우리 책임이 더 큽니다.” 강행장은 이후 모든 임직원에게 주치의론을 설파하면서 이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도록 지시했다.



 오는 2006년에는 국내 은행도 국제결제은행의 건전성 기준인 바젤2 도입이 의무화됩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 지원이 더 악화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데요.

 중소기업은 물론, 은행들에까지 커다란 변화가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기업은행도 바젤2 도입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단계별 작업을 진행중이지요. 바젤2는 은행의 자산건전성을 더욱 강조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따라 중소기업 여신도 보다 까다롭고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은행이나 중소기업들은 바젤2 도입까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요.

 중소기업은 체질 개선이 시급합니다. 금융 지원이 줄어들거나 막혔다고 하소연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국내 중소기업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창업 5~10년이 지나도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에요. 창업 당시야 자본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금융 지원이 필요하지만, 5년 정도 성장 기간을 가진 중소기업들은 자기 신용을 보강해 정책적인 금융 지원에서 졸업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선진화된 회계시스템 구축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은행의 재원은 소중한 국가 자원입니다. 자기 노력도 없이 금융 지원만을 기다리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국가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에요.

 또 거래 은행과의 관계 유지도 강화해야 합니다. 은행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한편으로는 은행도 사업성과 담보 평가를 통해 자금을 건전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또 공적 기관으로서 경기 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봐요. 건전성만 의식해 안전 자산에만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데서 벗어나 경기가 과열될 때엔 다소 보수적인 여신 정책을, 경기 침체 때에는 다소 적극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 3월로 취임 1년이 지났습니다. CEO로서 기업은행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중소기업에 특화된 은행으로서 기업 분석 능력이 여타 은행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을 들 수 있겠지요. 그 어렵다던 중소기업의 신용 평가 모형이나 소기업 신용 평가 모형 등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여신 심사 및 신용리스크 관리 등 각종 제도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분석 능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입니다. 또 풍부한 경험과 이론적 바탕을 겸비한 600여명의 여신 전문 심사역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강점이고요.



 금융기관들은 현재 생존을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기업은행도 예외가 아닌데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요.

 올해 은행권은 치열한 경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은행간의 우열이 가시화되는 거예요. 경쟁에서 필요한 것은 민첩하고 유연한 조직과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 그리고 실천력입니다. 또 이젠 글로벌 역량도 갖춰야 할 때지요. 기업은행은 그동안 경쟁력 향상을 위한 체질 개선에 주력했습니다. 2002년 실시한 사업부제 정착이나 국내 은행 최초의 차세대 전산시스템 개발 등이 모두 ‘뱅크워(Bank War)’를 대비한 것이었어요.

 현재 국내 시중은행들은 동일한 고객을 향해 비슷한 상품과 서비스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은행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강력한 실천력입니다. 이를 위해 경영혁신기획단과 경제연구소를 출범시켜 실천에 필요한 전략적 뒷받침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또 선진 은행과의 제휴를 통한 자산운용사 설립, 금융서비스 다각화를 위한 증권사와의 업무 제휴 등도 단계별로 추진하고 있어요.



 금융 환경 변화로 개인 종합자산관리서비스(PB)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데요. 기업은행만의 PB 공략법은 무엇입니까.

 기업은행은 중소기업 전담 은행으로서 PB 사업도 특화시킬 예정입니다. 우량 기업의 대표자를 위한 전문 자산 관리 등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미 기업은행 PB 고객의 65%가 중소기업 CEO들입니다. 중소기업 CEO 대상의 PB 업무는 개인 종합 자산 관리는 물론 해외 비즈니스 관련 직접 투자, 현지 법인 및 공장 설립 등 기업 경영 컨설팅까지 제공하는 것으로 일반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PB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요. 올해에는 PB 사업 확대를 위해 전문 영업점을 2배로 확대할 계획이며, ‘윈클래스’란 이미지로 일원화할 방침입니다.



 KTB와 함께 기업은행도 PEF 설립을 준비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투자 방법이나 대상은 준비됐나요.

 맞습니다. 현재 금융감독원에 설립 신청을 해놓은 상태로 아마 5월말이나 6월초쯤 1200억원 규모의 PEF 설립이 가능할 전망입니다. 하지만 여타 PEF와는 투자 방식이나 대상 등 개념이 달라요. 일반 PEF는 기업에 투자해 구조 조정을 통해 수익을 취하는 게 보통이지만, 기업은행의 PEF는 중소기업 중 사업성과 성장성이 있지만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와 융자, 컨설팅이 함께 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특징이지요. 또 PEF 투자로 경영권을 인수해도 CEO 교체 등 구조 조정은 하지 않을 방침입니다. 중소기업은 CEO 자체가 기업인 경우가 많거든요. CEO 자체가 기업의 생명인 셈이죠. 현재 투자 대상 기업들도 거의 정해진 상태입니다.



 최근 월례 조회에서 비이자 수익을 확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은행들이 너도나도 수수료 수입에만 의존하면서 돈벌이에만 치중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데요.

 비이자 수익 증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단순히 수수료를 올리는 것 이외에 고객에게 부담이 없는 펀드나 방카슈랑스 판매 등으로도 비이자 수익은 확대될 수 있지요. 우선 이런 부분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최근 은행들의 경쟁적인 비이자 수익 증대가 고객에게 부담만 가중시킨다는 언론의 지적이 있는데, 짧은 생각이라고 봐요. 은행들은 금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예대 마진을 줄여야 합니다. 그럴려면 비이자 수익 증대가 필수적이에요. 비이자 수익이 증대돼 예대 마진이 줄어들면 여·수신 고객의 금리 부담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언론에서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거래수수료 등 각종 수수료는 수익자 부담이 원칙입니다. 은행의 편의 제공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미국에선 일정 금액 이하의 예금에 대해서도 수수료를 받고 있어요. 수수료가 너무 높으면 고객이 알아서 취사선택을 할 것입니다. 이게 시장의 원칙이에요.



 시장에선 기업은행이 향후 종합 금융기관으로 성장하려면 ‘국책 은행’이란 껍질을 하루빨리 벗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대기업이나 웬만한 기업들은 돈이 넘치면서 은행들은 주요 기업금융 고객으로 중소기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기업은행의 특화된 시장도 메리트가 상당 부분 떨어지는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경기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책 금융기관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울타리에서 안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균형적인 자산 포트폴리오를 갖추기 위해 기업은행도 최근 소매금융 확대에 주력하고 있어요. 현재 자산 포트폴리오를 보면 소매금융 13%, 기업금융 84% 정도입니다.   아직까지 불균형한 구조지요. 기업은행은 관련 법 시행령상 자산의 80% 이상을 기업금융에 맞춰야 합니다. 앞으로 중소기업은행법 시행령을 완화토록 정부와 협의해 소매금융 포지션을 최대한 늘려 갈 생각입니다.



 지난해 짓궂은 날씨 속에서 중소기업의 우산 역할을 자청했던 강행장이 이젠 우산을 접고 주치의로 나섰다. 중소기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다. 그의 중소기업 지원 철학처럼 병마를 이겨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한국의 중소기업을 기대해 본다.

이창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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