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 예결위위원장이 11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등 조정소위원회 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며 회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안상수 예결위위원장이 11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등 조정소위원회 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며 회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470조5000억원에 달하는 내년도 수퍼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사가 졸속 처리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개점휴업 상태였던 국회가 11월 21일 여야의 전격적인 합의로 예산안 심사를 재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 등 조정소위원회(예산소위)도 가까스로 출범했다. 하지만 예산안을 심사할 수 있는 기간이 10일에 불과해 부실 심사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거세다. 당초 예산소위를 구성하기로 했던 11월 15일부터 심사해도 일정이 모자란데 이마저도 6일 줄어들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21일 ‘공공부문 채용세습 비리 국정조사’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중단했던 국회 예산안 심사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예산안을 제대로 처리하기엔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지적한다.

2014년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예산안은 11월 30일까지 예결위 예산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그다음 날(12월 1일)에 위원회에서 심사를 마치고 바로 국회 본회의에 부의되도록 법에 규정(자동부의제도)돼 있다. 다만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에 따라 본회의 상정을 연기할 수 있다. 법 제정 이전까지 국회가 예산안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고 다음 해로 넘기는 일이 많아지자 국회선진화법에서 아예 심사 기한을 못 박은 것이다.

예산소위가 가까스로 출범하지만 부실 심사는 불가피해 보인다. 예산소위 출범이 다른 해보다 일주일가량 늦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예산소위가 가장 늦게 꾸려진 때는 2014년과 2017년으로 그 당시에는 11월 13일에 소위가 구성됐다. 지난해에는 여야 합의를 거쳐 법정기한을 넘긴 12월 6일 예산안이 통과됐다.

그동안 여야는 예산소위 위원 숫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더불어민주당은 14인이나 16인으로 예산소위를 구성하자고 주장한 반면, 자유한국당은 15인으로 구성하자고 맞섰다. 14명이나 16명으로 구성하면 이른바 ‘범진보(민주당·평화당·정의당)’와 ‘범보수(한국당·바른미래당)’의 비율이 5 대 5로 같아진다. 반면 15명일 때는 ‘범보수’가 한 명 더 많다. 여야 어느 쪽이든 위원 한 명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 예산소위 위원들은 예산을 감액하거나 증액할 수 있는 막강한 파워를 가지기 때문이다. 예산소위 위원의 말 한마디에 수억~수천억원의 예산이 줄거나 늘어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예산소위 구성은 결국 민주당 안(16인)으로 결정됐다.

국민 입장에서의 정밀한 심사 역시 기대하기는 힘들다. 현재 예결위 심사 전 단계인 예산안 예비심사를 마친 상임위는 10개에 불과하다. 아직 6개의 상임위가 예비심사를 마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상임위에서 예비심사가 있기 전 정당별로 예산안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가 이뤄진다. 따라서 상임위 예비심사를 거치지 않으면 예결위에서 실질적인 심사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올해는 ‘쪽지예산(국회의원의 지역구 민원 예산)’이 어느 때보다 거셀 것으로 보인다. 2020년 국회의원 총선거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산을 끌어당긴다는 얘기다. 쪽지예산은 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 사업에 예산을 늘려달라고 다른 의원에게 쪽지를 건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회의원들이 상임위 예비심사보고서 등에 서로 품앗이하듯 자신의 지역구 민원 예산을 밀어 넣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최근엔 의원들이 메시지 전송 앱인 카카오톡을 이용하면서 ‘카톡예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미 상임위 예비심사에서는 일부 의원이 지역구 예산을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기획정재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상임위의 예비심사 결과, 감액된 예산은 약 4000억원인 반면, 증액된 예산은 4조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임위 예비심사 과정에서 예산을 깎지는 않고 적극적으로 늘리기에 나섰다는 뜻이다. 국회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 발전을 위해 예산을 따내려 하는 것을 나쁘게 볼 수만은 없다”며 “문제는 그 사업이 정말 타당한지에 대한 정밀한 심사보다는 지역구 표를 의식해 이뤄진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11월 30일이 지나면 예산안에 대한 실질적인 심사는 이뤄지지 못한다. 이후엔 여야 원내지도부가 굵직한 사안만 협상하고, 나머지는 예결위 위원장과 여야 간사, 정부(기획재정부) 관계자가 비공개 회동을 통해 나머지 예산을 논의한다. 이렇게 되면 현 정부가 주력하는 일자리와 일부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예산만 들여다보고 나머지 세부 예산안은 졸속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예산안의 본회의 자동부의제도로 인해 예결위의 역할은 유명무실해지고, 부실 ·졸속 심사 우려가 커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에도 여야는 예산안의 본회의 자동부의제도를 믿고 벼랑 끝 전술로 맞섰다. 여당은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 상정되면 정부안대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봤고, 야당은 예산안 심사와는 아무 연관 없는 국정조사를 얻어 내는 데 이를 활용했다.

국회 예결위의 한 전문위원은 “예산안 본회의 자동부의제도로 인해 예전보다 예산안을 심의하는 시간은 빨라졌다”면서도 “시한이 되면 자동으로 본회의로 넘어가는 바람에 정부 예산안을 꼼꼼히 따져 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일자리·남북협력 예산 두고 공방

여야는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예산의 감액과 증액을 두고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여당은 보통 정부의 원안대로 예산안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야당은 어떻게 해서든 줄이려고 한다.

올해 여야가 최대 공방을 벌일 분야는 일자리 예산이다. 정부는 사상 최대인 23조5000억원 규모의 일자리 예산을 편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은 확장적 재정운용을 통해 최악의 고용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며 예산안 원안 고수를 다짐하고 있다. 반면 야당은 정부가 직접 자금을 대는 맞춤형 공공 일자리는 임시직이나 단기 아르바이트에 불과하기 때문에 8조원 이상은 삭감해야 한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일자리 예산을 줄여 사회간접자본이나 연구·개발(R&D) 등 미래 먹을거리, 서민 체감 예산을 늘리자는 주장이다.

약 1조1000억원 규모의 남북협력 관련 예산을 두고서도 여당과 야당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정부는 남북협력기금을 올해(9592억원)보다 14%(1385억원) 증액한 1조977억원으로 책정했다. 이에 대해 야당은 UN의 대북제재 등으로 남북 경협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예산규모를 키우면 안 된다며 7000억원가량 감액을 요구하고 있다.


Plus Point

1기와 다르지 않은 2기 경제팀 민생경제 살릴 수 있을까

내년 예산안에 대한 심사가 진행 중이던 11월 9일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의 교체가 발표됐다. 야당은 예산안 심사 중에 경제 수장을 바꾼 전례가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경제 라인 교체로 인해 예산안 심사 일정마저 중단됐지만 정부 입장에선 그만큼 한국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2기 경제팀인 홍남기 경제부총리 내정자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최근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을 2.5%로, 내년 성장률은 올해보다 더 낮은 2.3%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성장률 2.3%는 유럽 재정위기의 영향을 받았던 2010년대 초반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 경제는 생산‧소비‧투자 지표가 모두 위축되면서 경기 하강 국면에 진입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실업률은 10월 기준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만큼 일자리 문제가 심각하다. 주력 산업의 경쟁력은 반도체를 제외하곤 이미 상실했다고 봐도 될 정도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 신흥국 위기, 중국 경제 불안, 미국 금리 인상 등 대외변수도 녹록지 않다.

하지만 새 경제팀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우려가 더 크다. 소득주도성장에만 집중하면서 경제 침체를 가중시킨 1기 경제팀의 노선을 2기 경제팀이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2기 경제팀이 1기와 같은 소득주도성장이나 혁신성장 정책만으로 침체된 경기를 끌어올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