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험을 시작하기 전, 친환경 한식당 ‘카페 슬로비’에 사전답사를 갔다. 사진은 젓갈 안 들어간 김치와 가지오이냉국 등을 곁들인 새송이 더덕구이 정식.
- 체험을 시작하기 전, 친환경 한식당 ‘카페 슬로비’에 사전답사를 갔다. 사진은 젓갈 안 들어간 김치와 가지오이냉국 등을 곁들인 새송이 더덕구이 정식.

완전채식을 처음 접한 건 작년 여름이었다. 혼자 스코틀랜드로 떠난 여행에서 독일인 친구 애스트리드(25·여)를 만났다. 그는 고기, 생선, 해물은 물론 달걀, 유제품 같은 동물성 음식도 전혀 먹지 않는 ‘비건(Vegan)’이었다. 하루는 바나나와 오렌지로 저녁식사를 때우고 있는 그가 걱정돼 견과류 봉지를 사서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뒷면의 성분 표시를 꼼꼼히 살피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먹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꿀 2% 함유’ 때문이었다. 꿀 역시 동물성 식품이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궁금한 마음에 “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벌이 생산한 부산물(꿀)을 먹는 것뿐인데 왜 안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꿀을 얻기 위해 벌을 가둬놓고 착취하는 환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유·달걀을 먹지 않는 이유도 비슷했다. 그는 소와 닭이 꼭 도살당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우유와 달걀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느낀다고 믿었다.

애스트리드가 사는 곳은 독일 바이에른주의 소도시 밤베르크다. 작은 시골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비건용 초콜릿, 콩 소시지, 두유크림 등 비건에게 필요한 모든 식재료를 근처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음식점 메뉴에는 ‘비건 전용’ 표시가 돼 있는 게 일반적이다. 메뉴에 없어도 부탁하면 식물성 재료(두부, 콩고기 등)로 대체해서 만들어주기도 한다.

외식 한번 하려면 장거리 이동해야
그러나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채식동호회 ‘한울벗’을 운영하고 있는 김승권 씨는 “(대전에 사는데) 주변에 완전채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드물다. 보통 집에서 요리해 먹지만 가끔 외식이라도 할 때는 버스 타고 한 시간을 나간다”고 말했다. 채식 메뉴인 것처럼 적어놓고 막상 시켜보면 고기가 들어있는 경우도 많다. 캐나다에서 유학하다가 최근 한국을 방문한 대학생 정혜선 씨는 “한국은 야채만두라고 적혀 있어도 속에 돼지고기가 들어있는 식이다. 피자집에서는 점원에게 ‘고기가 들어 있지 않냐’고 물어보고 시켰는데도 속에 햄이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채식에 대한 인식이 낮다보니 채식주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외국인 방문객에 대한 배려도 적다. 한 대학에서는 외국인 교환학생 환영회에서 점심식사로 햄이 든 샌드위치를 나눠줬다가 “왜 채식 메뉴를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항의를 받아야 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금 짐작이 갔다. 그러나 고기를 좋아하고 잘 먹는 기자로서는 그들의 고충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매 끼니 완전채식을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비건 생활을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지 직접 체험해보기로 했다. 5월7일부터 9일까지, 사흘 아홉 끼니 동안 도전했다.

- 첫째날 집에서 먹은 저녁식사. 집에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없어 된장, 미역, 두부를 넣은 국을 끓여 현미밥과 함께 먹었다.
- 첫째날 집에서 먹은 저녁식사. 집에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없어 된장, 미역, 두부를 넣은 국을 끓여 현미밥과 함께 먹었다.

첫째 날
아침은 콩떡과 오렌지주스로 해결했다. 평소에는 빵이나 요구르트를 먹곤 했다. 점심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쌀밥, 연근땅콩조림, 치커리사과생채, 과일통조림을 먹었다. 다행히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세 종류나 돼 만족했다. 특히 땅콩의 기름진 맛이 고기 없는 허전함을 달래줬다. 평소 밥 한 공기를 다 못 먹는 편이지만 이 날은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함께 나온 육개장, 갈치카레구이, 깍두기, 요구르트는 먹지 않았다. 퇴근 후 허기진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에 먹을 거라곤 현미밥밖에 없었다. 반찬으로 김치, 멸치조림, 계란, 햄 등이 있었지만 전부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김치는 배추가 주재료이지만 젓갈이 들어가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 서둘러 된장, 미역, 두부를 넣고 된장국을 끓였다. 고기를 넣지 않아 약간 밍밍했지만 맛은 괜찮았다. 밥과 국을 먹은 후엔 방울토마토와 감자칩을 후식으로 먹었다. 그제야 배가 좀 불렀다. 하루 종일 완전채식을 하니 슬슬 허전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 체험 둘째 날 구내식당에서 먹은 점심. 먹을 수 있는 반찬이 거의 없어 도토리묵 무침을 두 그릇 받아왔다. 2. 둘째날 저녁에는 어버이날을 맞아 가족과 함께 뷔페에 갔다. 사진은 첫 번째 그릇에 담아온 생채소와 간장드레싱, 아스파라거스 볶음, 콩샐러드 등.
1. 체험 둘째 날 구내식당에서 먹은 점심. 먹을 수 있는 반찬이 거의 없어 도토리묵 무침을 두 그릇 받아왔다.
2. 둘째날 저녁에는 어버이날을 맞아 가족과 함께 뷔페에 갔다. 사진은 첫 번째 그릇에 담아온 생채소와 간장드레싱, 아스파라거스 볶음, 콩샐러드 등.

둘째 날
아침도 떡과 주스로 시작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여느 때처럼 믹스커피를 타 먹으려다가 멈칫하고 성분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천연 카제인(우유)’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날 구내식당 점심 메뉴는 쌀밥 외에 도토리묵 무침과 샐러드밖에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묵 무침을 두 그릇 달라고 부탁했다. 조갯살미역국, 돈육김치두루치기, 숙주맛살무침, 깍두기는 먹을 수 없었다. 함께 먹던 선배는 숙주맛살무침에서 맛살을 빼고 숙주나물만 먹으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짜 비건이라면 동물성 식재료가 조금 섞여 있거나 우러난 것만으로도 그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의점에서 간식 사 먹기도 쉽지 않았다. 초콜릿에는 예상대로 성분 표시에 전지분유(우유)라고 적혀 있었고 크래커류는 버터·계란 때문에 안 됐다. 한참을 살펴보다가 옥수수 과자를 집어들었다. ‘이 제품은 우유를 사용한 제품과 같은 제조시설에서 제조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냥 먹었다. 아주 엄격한 비건은 수저와 조리도구도 따로 사용할 만큼 동물성 재료가 닿는 것조차 싫어한다.

호텔 뷔페서 스테이크 대신 콩 샐러드 먹어
저녁에는 어버이날(5월8일)을 기념해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족끼리 호텔 뷔페를 갔다. 서비스로 불도장이 나오고 메뉴에 포함돼 있다며 랍스터도 나왔지만 먹지 않았다. 가장 괴로운 건 냄새였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옆에서 나는 고기 냄새, 해물 냄새가 참기 힘들었다. 다행이었던 건 뷔페인 만큼 음식 종류가 많아 먹을 수 있는 것도 다양했다는 점이다. 세어보니 총 107가지 음식 중 27가지를 먹을 수 있었다. 접시에 콩 샐러드, 생채소와 간장드레싱, 아스파라거스 볶음, 구운 야채(파프리카, 버섯, 애호박, 가지), 알밤 조림, 호박죽, 바게트 빵과 올리브유, 과일 등을 담아 와서 남김없이 먹었다. 바게트 빵의 경우 직원에게 버터와 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걸 확인하고 먹었다. 식사를 끝내기 전, 한 접시만 더 가져오려는데 “그래도 뷔페 왔는데 안심 스테이크 한 점만 먹어라. 한 사람 당 9만2000원짜리 식사인데 아깝지도 않느냐”는 가족들의 회유와 타박이 들어왔다. 마음에 엄청난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양심에 손을 얹고 마지막으로 가져온 건 또 한 접시의 콩 샐러드였다. 고기에서 섭취하지 못한 단백질을 콩으로라도 더 먹겠다는 심산이었다. 가족들은 감탄하면서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혀를 내둘렀다.

- 셋째날 점심에 갔던 비건카페 ‘제로플랜’. 사진은 두부를 넣어 쫀득한 캐슈크림 초코케이크(오른쪽), 콩가루가 들어간 크림을 얹은 바나나 캐러멜 크림타르트, 블루베리 두유 스무디. (사진 : 오장환)
- 셋째날 점심에 갔던 비건카페 ‘제로플랜’. 사진은 두부를 넣어 쫀득한 캐슈크림 초코케이크(오른쪽), 콩가루가 들어간 크림을 얹은 바나나 캐러멜 크림타르트, 블루베리 두유 스무디.
(사진 : 오장환)

셋째 날
아침은 주말인 토요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빵, 계란, 소시지, 샐러드, 커피 등 풍성하게 차려 먹었겠지만 이 날은 사과와 한라봉으로 대신했다. 점심은 7호선 남성역에 위치한 비건 전용 디저트 카페에서 케이크로 식사를 대신했다. 이곳 빵은 버터, 계란, 치즈, 우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웬만한 디저트는 먹기 힘든 비건의 서러움을 덜어주는 곳이었다. 지인과 함께 단호박 ‘치즈’ 컵케이크, 레드벨벳 비트 컵케이크 등을 시켜 나눠 먹었다. 이곳에서의 ‘치즈’는 두부에 코코넛오일을 넣어 치즈처럼 되직하게 만든 크림이었다. 처음 맛본 비건 케이크는 예상과 달리 맛있었다. 식감이 고구마처럼 묵직했는데, 많이 먹어도 느끼하거나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 게 장점이었다. 음료는 두유로 만든 블루베리 스무디를 마셨다.

저녁에는 이태원의 유명하다는 채식 음식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주인 사정으로 그 날만 문을 닫아 하는 수 없이 채식이 가능한 다른 음식점을 물색했다. 여러 나라 음식점이 모여 있는 이태원답게 근처에 중동요리 전문점이 있었다. 중동(요르단) 음식은 콩을 으깨 동그랗게 빚어 튀겨낸 ‘팔라펠’, 콩을 갈아 만든 되직한 소스인 ‘호무스’, 버터·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둥글넙적한 빵 ‘피타’ 등 채식 메뉴가 비교적 다양하다. 음식점에서 팔라펠과 피타를 시켰다. 마늘 크림 소스, 다진 고기가 들어간 고추기름 소스가 곁들여 나왔지만 먹을 수 없었다. 소스를 전혀 못 먹고 빵에 튀긴 콩만 싸서 먹으니 느끼하고 목이 메었다. 보다 못한 지인이 팔라펠 위에 강제로 고추기름 몇 방울을 뿌렸다. 사흘 내내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결국 매운 맛의 유혹에 굴복해 비건 체험을 마무리했다.

완전채식이 몸에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주선태 경상대 축산학과 교수는 “고기를 먹어야 양질의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인당 고기 섭취량이 미국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를 마치 만병의 근원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광조 한국채식영양연구소장은 “완전채식으로도 모든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다. 오히려 고기를 먹는 게 몸에 해롭다. 고기에 든 콜레스테롤이 면역력을 떨어뜨려 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생선도 중금속이 많이 들어 있어 좋지 않다. 흔히 등푸른생선을 먹어야 오메가-3 지방산을 섭취할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데, 해조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섭취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사회생활 힘든 것이 가장 큰 어려움
그러나 비건을 포함한 채식주의자가 정말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따로 있다. 밖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김승권 씨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남들이 돼지고기, 소고기를 구워먹을 때 콩고기를 싸 가서 옆에서 구워 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8개월 간 이어온 채식을 포기한 대학생 박수정 씨는 ‘사회생활하기 힘들어서’ 채식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사흘 경험으로 외로움까지 느끼진 못했지만 확실히 완전채식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럴 법 했다.

완전채식을 하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낀 건 속이 전에 없이 편안하다는 점이었다. 억지로 먹었던 마지막 식사를 제외하고는 사흘 동안 한 번도 더부룩하거나 체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소화가 더딘 탓에 하루에도 여러 번 속이 더부룩할 정도였다. 완전채식을 하면서 음식 자체를 덜 먹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즉각적으로 소화가 된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쩔 수 없이 힘든 부분도 있었다. 소화가 잘 되다 보니 배가 빨리 고파져 늘 간식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과자, 케이크,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 소위 ‘디저트’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몸에 안 좋은 음식을 저절로 멀리 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고기는커녕 빵에 버터도 못 발라 먹으니 기력은 둘째 치고 마음이 허전했다.

서구 사회에서는 높은 고기 섭취량 못지않게 채식 문화도 같이 발달해 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채식주의자’라는 단어조차 낯설다. 하지만 건강이든 동물 애호든 채식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만큼 한국인의 삶의 방식은 다양해지고 있다. 

 

[채식의 7가지 유형]

채식의 유형은 채식하는 강도에 따라 다양하다. 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완전채식인 △비건(Vegan)부터 유제품과 동물의 알을 먹는 △락토-오보(Lacto-Ovo) 채식, 유제품만 먹는 △락토(Lacto) 채식, 동물의 알만 먹는 △오보(Ovo) 채식이 엄격한 채식주의로 분류된다. 이 밖에 생선 등 해물을 먹는 △페스토(Pesto) 채식, 붉은 고기를 먹지 않는 △폴로(Pollo) 채식, 평소엔 완전채식이지만 상황에 따라 육식이 가능한 △플렉시블(Flexible) 채식 등이 있다. 사찰음식은 기본적으로 완전채식이지만 우유·달걀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향이 강해 마음을 흩뜨린다는 이유로 오신채(五辛菜·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를 먹지 않는다.

 

[완전채식 맛볼 수 있는 곳]

비건 아닌 사람도 “생각보다 맛있네” 감탄

●러빙헛 카페 (개포동)
서울에 5곳, 전국에 21곳 체인점을 두고 있는 비건 전문 외식 브랜드. 개포동 카페 본점에서는 콩불고기, 순두부, 피자, 스파게티 등 식사류와 음료가 준비돼 있으며 채식 아이스크림도 맛볼 수 있다. 02-576-2158

●카페 슬로비 (홍대입구역)
사회적기업 ‘오가니제이션 요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친환경 한식당으로 성북·제주 지점도 있다. 모든 음식은 김치와 국을 포함해 완전채식으로 바꿀 수 있다.

●플랜트 (이태원)
골목 안쪽에 있어 다소 찾기 어렵지만 비건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버거, 샌드위치, 부리또, 스튜 등 매주 메뉴가 바뀐다. 외국인 손님이 많은 편이다. 070-4115-8388

●제로플랜 (남성역)
커피, 스무디 등 음료와 케이크, 타르트, 쿠키 등을 판매하는 비건 카페. ‘무계획’이라는 이름 뜻에 걸맞게 수시로 메뉴가 바뀐다. 010-6838-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