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이 촉발한 무역전쟁으로 세계를 잇는 부품 공급망이 위기에 빠져 있다. 사진은 7월 11일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서 수출을 기다리고 있는 컨테이너들. 사진 블룸버그
미국과 일본이 촉발한 무역전쟁으로 세계를 잇는 부품 공급망이 위기에 빠져 있다. 사진은 7월 11일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서 수출을 기다리고 있는 컨테이너들. 사진 블룸버그

‘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 Assembled in China’ 애플의 모든 제품 뒷면에는 이 글귀가 붙어 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애플이 디자인하고 중국에서 조립했음.’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해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애플의 생산 방식을 대표하는 문장이다.

실제로 애플의 아이폰은 세계 43개국에서 생산한 부품으로 완성된다. 시장 조사 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최신 스마트폰 모델 ‘아이폰 XS 맥스’의 부품 원가별 국가 비중은 한국(32.9%), 미국(30.7%), 일본(13.5%), 대만(2.1%)순이다. 이런 식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곳은 애플뿐만이 아니다. 세계 생산 공장과 공급망 구매 정보를 활용해 제조 원가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소싱’ 방식은 현대 기업 경영의 상식으로 통한다.

그런데 2019년 이 글로벌 ‘상식’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작한 보호무역주의 신호탄은 미·중 무역전쟁을 넘어 한·일 통상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7월 1일 한국 반도체 핵심 소재 3종(고순도 불화수소, 감광액,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 규제를 발표한 데 이어, 7월 24일 이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를 간소화하는 우방국 명단)에서 제외할 계획이다.

자유무역·세계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의 일관된 흐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이 경쟁적으로 쌓아 올린 보호무역주의의 벽이 1930년대 대공황으로 이어지자,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미국은 무역 자유화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경제 제도를 구축했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서 시작해 세계무역기구(WTO), 국가별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진화한 자유무역주의는 75년간 세계를 ‘지구촌’으로 묶었다.

하지만 최근 세계 기업 환경은 정치권의 주도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는 ‘패권경쟁’,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관세와 수출 규제 카드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특정 계층의 피해의식도 건드렸다. 일본통으로 꼽히는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전문위원은 “미국의 일자리를 중국에 빼앗겼다는 미국 중산층의 생각, 세계 반도체 1등 자리를 한국에 빼앗겼다는 일본 중산층의 반감이 여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자유무역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경제 상황은 혼란스럽다. 얽히고설킨 공급 관계 탓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가능성은 적다. 실제로 반도체 생산 핵심 소재인 감광액 수출 규제로 삼성전자의 생산 일정이 차질을 빚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일본의 무라타·히타치·교세라 등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에 이들이 공급한 부품이 상당수 들어가기 때문이다.

애플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로부터 납품받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생산의 핵심 소재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다. 애플의 생산이 타격을 입으면 다른 부품처인 재팬디스플레이(JDI)·TDK·도시바·파나소닉 등의 매출에도 영향이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 애플은 미·중 무역전쟁 장기화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 생산량의 15~30%를 해외로 분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기업들의 혼란상은 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반도체 업체인 브로드컴은 미국 정부의 화웨이 제재를 이유로 실적 전망을 내려 잡았다. 브로드컴의 매출 중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달한다. 자동차 반도체 업체인 독일 인피니언도 지난 5월 일부 미국 생산 제품의 화웨이 공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역전쟁이 길어질수록 인피니언 고객사인 독일 차 업체의 중국 매출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천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국제 규범을 준수하던 통상 체제가 지금의 글로벌 공급망을 완성했지만, 현재 이 규범을 무시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면서 “통상 등 경영 환경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했다.


‘비상사태’ 발동한 삼성전자

한국 기업들도 ‘시계(視界) 제로’의 상황이다. 특히 8월 22일 실효성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이는 화이트리스트 제외 시행령에 따르면 앞으로 총 1112개 품목이 한국으로의 수출이 규제된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7월 17일 스마트폰(IM)과 소비자가전(CE) 부문 협력사에 “일본산 소재·부품을 최소 90일분 이상 확보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수출 통제 범위가 반도체에 이어 스마트폰·가전 분야로 확대할 것으로 보고 사실상 ‘비상 계획(컨틴전시 플랜)’을 발동한 것이다.

반도체 수출 전망은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작년 10월 이후 계속된 반도체 시황 둔화로 완제품 재고가 쌓여 있는 데다, 고객사도 재고 확보에 열을 올릴 것으로 보여 오히려 상황이 괜찮아질 수도 있다고 본다. 재고를 소진하는 것으로 당장의 차질을 일정 부분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24시간 가동 체제로 수백 개 공정이 맞물려 돌아가는 생산 라인 특성상 잠깐이라도 가동이 중단되면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악의 경우 (제조 업체의 생명줄과도 같은) 생산 라인이 중단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기술 독립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충격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극제가 됐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자금력을 등에 업은 대기업 중심으로 움직여온 한국 반도체 산업은 신뢰성이 높으면서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기존 일본산 소재·장비에 의존해왔다. 국산 대안(代案)을 키우려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그동안 국산화율이 낮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지만, 쉽사리 공급처를 바꾸기 어려운 구조”라면서 “이번 사태가 자극제가 돼 중소기업들이 사업을 더 확장하고 새 분야에 도전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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