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부터 시계방향) SNL의 예고편 유튜브 영상 캡처. 4월 11일 개봉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랙 서머’의 한 장면. 주인공 중 하나인 ‘경선’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13일(현지시각) SNL에서 공식 컴백 무대를 가졌다.
(위부터 시계방향) SNL의 예고편 유튜브 영상 캡처. 4월 11일 개봉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랙 서머’의 한 장면. 주인공 중 하나인 ‘경선’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13일(현지시각) SNL에서 공식 컴백 무대를 가졌다.

“당신 뭐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빨리 이쪽으로 와요! 그 여자한테서 도망가야 된단 말이야! 빨리 뛰어!” “일단 저기, 직진으로 가세요. 직진, 두 블록. 그런 다음 여기서 돌아야 돼요.” “아저씨, 저기요. 저 사람들 우리 가스(가솔린) 노리고 있는 거예요, 가스!”

한국 드라마 장면이 아니다. 4월 11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좀비 드라마 ‘블랙 서머(Black Summer)’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경선’의 대사다. 경선은 10여 명의 주인공 중 유일한 동양인으로, 영어를 할 줄 모른다. 밑도 끝도 없이 한국어로만 떠드는데도 드라마의 한 축을 담당하며 서양인 사이에서 ‘멋진 안내자’ 역할을 한다. 2010년 종영된 미국 ABC 히트작 ‘로스트(Lost)’에 나온 “왜 나 꽈찌쭈는 햄보칼수가업서(왜 나 권진수는 행복할 수가 없어).” 같은 엉터리 한국어가 아닌 ‘진짜 한국어’를 사용한다.

방탄소년단(BTS)은 13일(현지시각) 미국 NBC 라이브 코미디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서 새 앨범 컴백곡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의 공식 활동을 개시했다. SNL의 예고편 영상에서 할리우드 스타 에마 스톤(Emma Stone)은 4명의 여성 출연진과 함께 방탄소년단 팬을 연기했다. ‘I♡BTS’ 등이 적힌 옷을 입고 무대 전체에 온갖 방탄소년단 포스터를 붙였다. 에마 스톤이 “BTS가 올 때까지 이 무대에서 캠핑하며 기다릴거야”라고 한 것이 압권이었다.

한국 가수가 ‘SNL’을 통해 컴백 무대를 가진 것은 방탄소년단이 최초다. 작가이자 배우로 활동하는 한국계 캐나다인 폴 배(Paul Bae)는 같은 날 트위터를 통해 “SNL을 1970년대 후반부터 시청해왔지만 90년대 들어 시청을 그만뒀다. 쇼에서 아시아인을 한 명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 쓰렸다. 그런데 오늘 일곱 명의 한국인이 그 무대를 빛내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SNL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에스콰이어’는 비영어권 노래를 배척하던 미국인이 바뀌고 있다고 전하며 “그동안 미국 시청자들이 백인 남성 그룹만 숭배하던 현상을 BTS가 바꿔 놓았다”고 평가했다.

한국 소비자를 겨냥한 미국 콘텐츠가 아니라 미국인을 위한 미국 콘텐츠에 제대로 된 한국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동안 이렇게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한 서양 콘텐츠는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콘텐츠도 보다 보면 ‘여기가 한국이야, 베트남이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에 대한 묘사가 엉터리였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방영된 미국 드라마 ‘매시(MASH)’는 한국전을 배경으로 했지만, 고증이 엉망이었다. 드라마 속 한국 여성들은 일본 복식을 했고 남성들은 베트남식 모자를 썼다. 2017년 시즌 7을 끝으로 종영된 인기 미드 ‘하와이 파이브 오(Hawaii Five-0)’는 어눌한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인과 한국을 지나치게 후진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한국 시청자의 분노를 샀다. 그동안 외국 미디어에 노출되는 한국과 한국어의 이미지는 ‘쿨’하지 않았다. 악센트가 강한 가난한 노동자, 허름한 주유소 주인, 일만 하다 과로사하는 어리석은 민족 등으로 묘사됐다. 그동안 서양 문화 콘텐츠 속의 이미지가 제일 멋졌던 아시아권 나라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한국과 한국어 콘텐츠가 갑자기 ‘멋있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젊은 외국인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BTS 덕분에 한국인인 것이 더 쿨해졌다”

1998년생 3세대 미국 교포 제이슨 서(Jason Seo·한국명 서동원)는 K-팝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어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도 덩달아 많아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 중에는 방탄소년단 멤버를 직접 보기 위해 홍콩까지 가고, 그들의 콘서트 표를 구하기 위해 수백만원을 쓴 친구도 있다”며 K-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어도 같이 공부하게 됐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한국의 인기로 이어진 것 같냐는 질문에는 “정말로 방탄소년단 덕분에 ‘한국인인 것’이 더 쿨해졌다(BTS definitely made being Korean more cool)”고 대답했다.

스무 살의 나고야단기대 학생 미우라 나노(三浦渚乃) 또한 K-팝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빅뱅을 좋아하게 되면서, 빅뱅의 노래 가사와 그들이 출연하는 한국 방송을 이해하고 싶어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미우라는 빅뱅의 일본어 버전 노래보다는 한국어 원곡을 들으면서 한글 단어와 문장 공부를 한다. 주로 한국 친구와 사용하는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은 블랙핑크의 멤버 ‘지수’이고, 배경 사진은 ‘빅뱅’이다.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빅뱅의 사진이 인쇄된 투명 파일과 플라스틱 부채가 들어 있다.

유튜브에 ‘Tips for learning Korean(한국어 공부 팁)’이라고 검색하면 수천 명의 외국인이 한국어 공부에 대해 조언하는 영상들을 볼 수 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하면 한국어를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지, 스스로 연구해 알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4월 19일 기준으로 ‘Korean Unnie 한국언니’ 채널의 ‘Learn the Top 25 Must-Know Korean Phrases!(꼭 알아야 하는 한국어 문구 25개를 배워보자)’ 영상은 조회 수가 208만 회다. 해당 영상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댓글은 ‘shaain shaana’가 쓴 “K-팝 노래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려고 한국어 배우는 사람? 나는 방탄소년단 팬!”이다. 좋아요가 약 1300개나 달렸다. 105개의 대댓글(댓글의 댓글)은 ‘나도 방탄소년단 팬’ 일색이다.

20년 넘게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인 요시카타 베키 서울대 언어능력측정센터 선임연구원은 “서양에서 온 제자들의 상당수가 K-팝을 계기로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고 한다”며 K-팝의 인기가 한국어의 인기로 이어진 것이 맞다고 했다. “방탄소년단 덕분에 한국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서양에선 아시아 남성을 멋있다고 주목한 적이 별로 없지 않나. K-팝이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얻은 것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대한 서양의 시각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연결됐다.”

K-팝의 인기로 한국어가 덩달아 부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외국인이 한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될 것인지 묻자, 그는 로마자 표기법을 직관적으로 개정하는 것을 제안했다. 외국인이 처음 한글을 익힐 때 로마자 표기법을 보고 어려워하는데, 표기법을 보고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발음과 실제 발음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시카타 선임연구원은 “로마자 표기만 보고도 실제 발음을 알기 쉽도록 표기법을 보완한다면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의 심리적 장벽이 낮아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