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제50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사업성과 발표를 듣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제50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사업성과 발표를 듣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지난 20일 서울 서초사옥에서 열린 제50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이하 주총). 오전 9시에 시작된 주총에서 일부 주주의 반대가 있었지만 사외이사 선임 안건이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다. 삼성전자는 총 6명인 사외이사 가운데 절반의 임기가 이번 달에 만료됨에 따라 2명의 사외이사 후보(김한조·안규리)의 신규 선임과 기존 사외이사 1명(박재완)의 재선임안을 주총 안건에 올렸다. 하지만 일부 주주가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와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해 ‘독립적인 직무수행이 어렵다’고 비판하면서 한때 논란이 불거졌다. 박재완 전 장관은 과거 이명박 정부의 인사로 삼성의 대외 이미지에 손상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박 전 장관은 삼성그룹의 공익법인인 성균관대 현직 교수(행정학)이기도 하다.

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는 2005년 2월부터 사단법인 라파엘인터내셔널 상임이사로 있으면서 외국인 노동자 무료 진료 등 사회공헌 활동을 해왔고, 이런 공로로 2017년 사회봉사상 부문 호암상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라파엘이 3억원에 달하는 상금을 받아 사외이사로서 독립적인 업무수행을 할 수 있겠냐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원안대로 처리됐다. 최대주주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 특수관계인 지분율이 약 19%에 달하기 때문이다. 대주주 중 한 곳인 국민연금(지분율 8.95%)도 찬성표를 던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이사회 독립성과 선진화를 위해 출범한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후보를 추렸지만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도 나왔다. 임기가 끝나는 이인호 전 신한은행 은행장, 송광수 전 검찰총장,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중 박 전 장관만 살아남았고, 글로벌 기업 출신 외국인 사외이사가 선임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지만 빗나갔다.


전직 고위 관료 모시기 행태 여전

오너와 대주주의 독단경영을 막고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제도가 ‘빈껍데기’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경영활동을 객관적으로 감시·감독해야 하지만 사실상 지배주주와 경영진의 결정에 힘을 보태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 사외이사제도가 도입된 것은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다. 총수나 전문경영인(CEO)의 무리한 기업운영이 위기로 이어졌고, 이를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지만 사외이사의 독립성 확보는 아직까지 멀기만 하다.

실제 삼성전자 사업보고서를 보면, 박재완 전 장관은 2016~2017년 삼성전자 이사회에서 반대 의견을 단 한 번도 낸 적이 없다. 박 전 장관은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의 중·고교·대학 후배이기도 하다.

과연 대기업의 사외이사에는 누가 선임될까. ‘이코노미조선’이 국내 30대 그룹의 지주회사와 주력 계열사 39곳의 사외이사 169명을 집중 분석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기준으로 했다.

30대 그룹 지주회사, 주력 계열사의 사외이사 특징은 ‘64세의 서울대 경제·경영학과 교수, 고위 관료’ 출신으로 요약된다. 교수 출신 사외이사는 54명(32%)인 것으로 집계됐다. 학교별로 분류하면 서울대가 15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고려대·서강대가 4명, 연세대·성균관대가 3명이었다. 이외에도 중앙대·이화여대(2명)를 비롯해 카이스트, 경희대, 한양대, 국민대, 서울시립대 등 다양한 대학에 분포돼 있었다.

사외이사로 교수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은 교수들이 정부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관련 정부 위원회나 학회, 관련 기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기업의 미래 성장과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수의 사외이사 영입은 이사회의 신뢰성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된다. 대학은 그 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곳 중 하나다. 유명 대학의 유명 교수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면 기업과 이사회의 신뢰도와 함께 정책 결정의 정당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사외이사로 선임된 교수들의 전공 분야는 경제·경영이 대다수였고, 법률·공학 등은 소수에 불과해 견제 장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힘든 구조라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경제·경영학과 교수들이라도 그들에게 기업 경영에 대한 전문성을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전직 고위 관리 모시기’ 행태도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외이사 169명 중 장·차관이나 판·검사,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권력기관 출신이 24.3%인 41명으로 조사됐다. 최근 경제민주화 추세에 따른 경영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고위 관료 출신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관료 출신 중에는 판·검사 출신이 17명으로 가장 많았고, 국세청·관세청 등 세무 관료 출신도 7명에 달했다. 이어 청와대(4명), 공정거래위원회(4명), 금융감독위원회 및 금융감독원(3명)순이었다.

대기업 지주회사와 주력 계열사들은 대부분 1~3명 정도의 전직 관료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는데, 롯데쇼핑·효성·미래에셋대우는 각각 3명의 고위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두고 있었다. 기업들이 전직 관료나 법조계 출신 사외이사를 두는 것은 이들이 해당 분야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외풍을 막아 줄 바람막이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오너가 재판 중이거나 정부 영향을 많이 받는 기업들은 전직 관료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경우가 많다. 효성그룹의 경우,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손영래 전 국세청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손병두 전 KBS 이사장 등 막강한 사외이사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대기업 지주사 중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단 한 명도 없는 곳은 LS와 에쓰오일, 대우조선해양, 한국투자금융 등 4곳이었다.

169명의 사외이사 중 대형 법무법인(로펌) 출신 변호사와 고문도 13.7%(23명)에 달했다. 가장 많은 사외이사가 활동하고 있는 법무법인은 김앤장(8명)이었으며, 태평양(4명), 율촌·화우(각각 3명)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현직 로펌의 고문으로 고위 공직자 출신이란 점도 공통점이다. 사실상 대관업무를 목적으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소수이긴 하지만 전문경영인 출신 사외이사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로는 김신배 포스코 사외이사가 꼽힌다. SK텔레콤 사장과 SK그룹 부회장을 역임한 김신배 이사는 지난 15일 서울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포스코 주총에서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여러 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하는 ‘겹치기’ 사외이사도 제법 된다. 박재완 전 장관은 삼성전자와 롯데쇼핑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은 기아자동차와 GS의 사외이사를 함께 맡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사외이사 후보군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한 사외이사가 다른 기업의 사외이사를 동시에 맡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들 사외이사의 평균나이는 64.3세였다. 에쓰오일의 사외이사인 이승원 전 국제스키연맹 집행위원이 1932년생으로 최고령자였다. 이 이사는 에쓰오일의 전신인 쌍용정유의 회장을 역임했다. 가장 나이 어린 사외이사는 교보생명보험의 하라 라잔(1977년생) 이사였다. 하라 라잔 이사는 교보생명의 외국계 대주주인 미국 PEF 코세어캐피털 측에서 요청한 인사다.

연령별로 보면 60대가 100명으로 가장 많았고, 50대(33명), 70대(30명), 40대(5명), 80대(1명) 순이었다.

유리천장도 여전했다. 169명의 사외이사 중 여성은 5명에 불과했다. 국내 기업의 여성 사외이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외이사 독립성 확보 아직 멀어

사외이사의 이사회 참석률은 80% 이상이었지만, 이사회 안건이 부결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은 대부분 원안대로 통과됐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2017년 5월부터 2018년 4월까지 1년간 56개 대기업 소속 상장사의 이사회 안건 5958건 중 부결된 안건은 8건(0.13%)에 불과했다. 이사회가 사실상 ‘거수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삼성전자의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반대의견을 낸 것은 딱 한 번밖에 없다. 그것도 나머지 이사들이 모두 찬성해 안건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사외이사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설치된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이하 사추위)’ 역시 허점투성이다. 현행 상법은 사외이사 후보추천 절차의 독립성을 확보할 목적으로 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인 상장사의 사추위 설치를 의무화하고 사외이사가 총위원의 과반수를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경영진이 사추위에 참여해 독립성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이 공정위가 지정한 31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중 29개 기업집단의 비금융 상장계열사 174개사의 사추위 설치현황을 조사한 결과 55%인 95개사가 사추위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중 58개사(61%)는 대표이사가 사추위 위원이었으며, 사외이사가 위원장인 회사는 18개사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추위가 독립성이 결여된 채 운영되고 있었던 셈이다.

전문가들은 “대표이사가 사외이사 후보추천 절차에 관여하면 사외이사의 독립성이 침해당할 수밖에 없고, 경영진의 사외이사 지배가 더 수월해진다”고 지적했다.

사외이사가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현행 제도의 수정·보완이 필수적이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원은 “사외이사의 CEO와의 학연이나 지연 등의 정보를 포함해 이사회 출결, 이사회에서의 질문 내용과 횟수, 발언 시간 등과 같은 객관적인 지표들이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욱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기업들이 주주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외이사를 지배주주나 경영진에 우호적인 인사로 채우려는 경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사외이사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인력 풀 확대와 사외이사에 대한 정보제공 의무화 등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Plus Point

금융권, 경쟁사 전 CEO를 사외이사로 선임

김문관 기자

금융권은 올해 비교적 잠잠한 분위기에서 주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금융권은 올해 비교적 잠잠한 분위기에서 주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금융권도 지난 21일부터 정기주주총회(이하 주총) 시즌이 시작됐다. 지배구조 문제로 시끄러웠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비교적 잠잠한 분위기에서 주총이 진행되고 있다. 금융권은 오너 체제가 아니라 전문경영인 체제로 경영됨에도 불구하고 파벌싸움 등 지배구조 문제가 잡음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다. 지난해 채용비리 사태 등 대외적인 비판을 받으면서 내부적인 지배구조 문제는 일단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으로 풀이된다.

올해 금융권은 학계와 법조계, 관계 일변도였던 사외이사진의 구성에 전문성을 가미하는 분위기다. 전직 경쟁사 CEO를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리딩뱅크’ KB국민은행은 21일 주총에서 법률과 리스크 관리 강화를 위해 안강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과 석승훈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KEB하나은행은 22일 주총에서 디지털 부문을 강화하기 위한 사외이사 선임을 단행했다. 신규 선임된 사외이사는 이명섭 전 한화생명 경제연구원장과 김태영 필립스아시아·태평양 전략사업부문 전 대표다. 이들은 IT(통신기술)와 전산 분야 전문가다. 같은 날 하나금융그룹은 신한은행 부행장과 신한데이타시스템 사장을 역임한 이정원씨를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신한금융지주는 27일 주총에서 이윤재 전 대통령 재정경제비서관, 변양호 VIG파트너스 고문(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성재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허용학 홍콩 퍼스트 브리지 스트래티지 대표(전 홍콩금융관리국 대체투자 대표) 등 4명을 신임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경제관료 출신인 이 전 비서관과 변 고문,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허 대표 모두 투자은행(IB) 전문가로 꼽힌다.

27일 주총을 여는 KB금융지주는 신임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회 위원으로 회계 전문가인 김경호 홍익대 경영대 교수를 선임한다. 같은 날 우리은행은 주총에서 오정식 전 씨티은행 부행장을 IBK기업은행은 신충식 전 NH농협금융지주 회장과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를 각각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에는 IB와 IT 등 전문가 신규 선임도 늘고 있는 분위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