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프 에르도안(사진 왼쪽) 터키 대통령은 “미국에 달러가 있다면, 우리에겐 알라(신)가 있다”면서 미국의 경제 제재에 맞설 것을 분명히 했다. 사진 AFP 연합
레제프 에르도안(사진 왼쪽) 터키 대통령은 “미국에 달러가 있다면, 우리에겐 알라(신)가 있다”면서 미국의 경제 제재에 맞설 것을 분명히 했다. 사진 AFP 연합

2011년부터 터키발 금융위기가 세계로 확산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0년간 값싼 이자의 외채로 빚잔치를 벌였던 터키 기업과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결말은 좋지 않을 것”이라며 “터키는 ‘탄광의 카나리아(위험을 미리 경고해준다는 뜻)’로 세계 경제는 어떤 면에서 2008년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영국의 작은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이코노미스트가 투자자에게 쓴 레터에서였다. 이 레터는 8월 11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에 소개되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의 말대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세계 국내총생산(GDP) 중 1.4% 남짓을 담당하는 작은 나라 터키발 위기에 요동치고 있다. 15일 기준 미 달러화에 대한 터키 리라화 환율은 6리라까지 올랐다. 6리라와 1달러를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연초 달러당 리라화 환율이 3.8리라 선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거의 절반 가까이 통화가치가 폭락한 것이다.

터키에 대출을 많이 해준 이탈리아 유니크레디트은행, 스페인의 BBVA은행 등 유럽 주요 은행의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등 터키발 위기는 이미 터키를 넘어 확산하고 있다. 자국 통화 가치 하락으로 갚아야 할 빚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터키 기업들은 상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 결과 은행들은 부실화될 수 있다고 투자자들이 보고 있는 것이다. 터키의 통화가치가 하락하면서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중국이나 브라질, 멕시코 등의 통화도 덩달아 약세를 보이고 있다.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신흥국 투자 전문가로 꼽히는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자산운용 회장은 터키 위기의 본질을 대규모의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 자신의 포퓰리즘적 경제 정책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독재자가 있다는 점 등 두 가지로 꼽고 있다.

이런 와중에 터키는 해외 투자자에 더 의존하면서 외형적으로는 지난해 GDP 성장률 7.4%를 달성했다. 그러나 내실을 뜯어보면 대외 채무는 늘고 외화보유액은 줄었다. 지난 6월 기준 터키의 외화보유액은 755억7000만달러로 단기채무 1222억6000만달러의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다.


“결국 IMF 구제금융 받게 될 것”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리더십은 문제를 되레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2003년부터 총리 3연임 이후 2014년 터키 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에 오르면서 이미 15년 장기 독재를 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개헌을 통해 아예 총리직을 없애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시켰고, 5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최대 세 번(최장 2033년까지)까지 할 수 있도록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지난 6월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자신의 사위를 재무장관에 임명하고 터키 중앙은행 총재 임명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등 통화·재정 정책의 독립성을 훼손시켰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미국인 목사 감금과 러시아 미사일 방어 시스템 S-400 구입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다. 이는 10일 “터키산 알루미늄·철강 관세를 2배로 올리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로 리라화 가치가 하루 만에 16%나 폭락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됐다.

그러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터키가 몰락할 가능성은 적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터키는 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의 교차로다. 터키가 무너지면 주변 나라들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터키가 안정을 되찾도록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오닐 전 회장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그간 터키의 경제발전을 위해 숙원사업이었던) 유럽연합 가입과 관련해 ‘안 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유럽 사람들은 터키가 결국에는 서구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란 희망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미정 국제금융센터 신흥국팀 차장은 “터키는 자금이 유입돼야 유지될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이 있는 만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Plus Point

터키發 리스크에 아시아 외환위기 재현될까

터키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CDS 프리미엄(5년 만기 국채 기준)’도 치솟고 있다. 13일 기준으로 터키의 CDS 프리미엄은 543bp(1bp=0.01%)를 기록해 2008년 금융위기 수준까지 높아졌다.

이런 위기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처럼 한국의 발목을 잡을까. 지난 9일에만 해도 2300 선에서 거래를 마친 코스피지수가 10일, 13일에 걸쳐 2250 선까지 떨어지면서 한국도 직격탄을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터키발 위기가 한국으로 전염될 수 있지만, 당장의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먼저 터키 대출이 많은 유럽 은행 위기로 인한 금융권 전염 가능성을 가정해볼 수 있다. 리라화 급락은 터키의 외화표시 대외채무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터키의 대외채무 규모는 올해 1분기 기준으로 4666억달러인데, 이 중 94%가 외화표시 부채다. 리라화 가치가 하락하면, 갚아야 할 돈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상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중 외국 은행들의 터키 대출 규모는 2232억6000만달러다. 이 중 스페인이 808억9000만달러로 가장 비중이 크다. 프랑스(351억4000만달러), 이탈리아(184억9000만달러)가 그 다음을 잇고 있다. 즉, 터키의 채무 중 유럽 은행 비율만 무려 74%에 달한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금융권의 터키 대출 규모는 12억달러가 채 안 된다. 전체 대외 대출 총액 중 0.5%에 그치는 수준이다. 

두번째 가능성은 신흥국에 대한 투자심리가 약화되면서 달러 강세가 심화돼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한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유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가능성을 좀 더 높게 보고 있다. 정다이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한국은 터키와의 교역 규모가 694만달러(2017년 기준)로 작고 금융 교류도 거의 없어 터키 불확실성에 따른 직접적 영향권은 아니다”면서 “다만, 리라화 폭락에 따른 유로화 약세, 안전자산 선호 심리 강화 등이 달러화 강세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국인 수급에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 흐름을 보면, 연초 이후 달러당 1060~1080원 선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움직이던 환율은 16일 외환시장에서 1130원 수준까지 올라간 상황이다(원화 가치 하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