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피파 세계 랭킹 1위이던 독일과 대한민국 경기 모습. 당시 0 대 2로 참패한 독일의 피파랭킹은 2004년 이후 가장 낮은 16위로 추락한 상태다. 사진 독일축구협회
2018년 6월 피파 세계 랭킹 1위이던 독일과 대한민국 경기 모습. 당시 0 대 2로 참패한 독일의 피파랭킹은 2004년 이후 가장 낮은 16위로 추락한 상태다. 사진 독일축구협회

스포츠는 때때로 그 나라의 경제·사회 상황을 반영한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이다. 독일 사회 전반과 국가대표 축구팀에는 독일의 정신적 유산인 ‘팀가이스트(Teamgeist·팀 정신)’가 깃들어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공인구 이름이기도 했던 팀가이스트 덕에 ‘전차군단’이라 불리는 최강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시작은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1954년 스위스 베른에서 개최된 월드컵 우승이었다. 전범국이었던 독일은 직전 월드컵 때 출전금지국이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컸다. 당시 강팀이던 헝가리를 이긴 서독 대표팀은 정신적·경제적으로 무너진 전후 독일 국민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줬다. 그 후 독일 경제·사회가 라인강의 기적과 하르츠 개혁으로 성장하자, 독일 축구도 이에 발맞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독일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작년부터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는 독일 축구 상황을 “팀가이스트보다는 가이스트(Geist·유령)에 가깝다”라고 표현했다. 팀가이스트의 핵심인 화합·통합·협력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독일 사회 전반에서도 보여진다. 이미 6차례 개항이 연기된 신베를린 국제공항은 최근 또 한 차례 연기됐고, 합병에 실패한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는 배드뱅크(부실채권전담은행) 설립 예정이라는 소식이 나왔다. 독일 국가대표팀과 독일 사회의 원동력인 팀가이스트의 시작과 최근 분열 상황을 짚어봤다.


1│전후 1950년대, 전설의 수비수 탄생

1950년대 독일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컫는 ‘라인강의 기적’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잿더미에서 일궈낸 것이었다. 독일 경제는 패전 이후 1970년대 오일 쇼크 전까지 꾸준하게 성장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950∼73년 독일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9%였다. 독일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는 물적, 심리적 토대를 마련한 1950년대만 보면 평균 경제성장률이 7.9%에 달했다. 이는 1970년대 독일 축구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가 유년시절을 보낸 시점이다.

베켄바워는 1945년에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1959년 뮌헨 유소년 축구단에 입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태어난 그는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시대에 사는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던 어머니의 격려 속에서 긍지와 열정을 길렀다. 어린 베켄바워는 해진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면서 축구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다.

베켄바워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하면서도 120분간 경기장을 뛰며 팀을 4강 진출로 이끌었고, 이후 국제 대회를 거치며 ‘카이저(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베켄바워의 활약에 힘입어 당시 독일 대표팀은 유럽축구연맹(UEFA)이 개최한 UEFA 유로1972(숫자는 개최 연도)와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연달아 우승했다.

은퇴 후 베켄바워는 서독 대표팀 감독으로 지휘봉을 쥐었다. 그가 감독으로 있던 시기 독일 대표팀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우승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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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된, 축구선수 외질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사진. 사진 슈피겔

2│과감한 개혁으로 병폐 치료한 2000년대

독일의 경제 성장은 1980년대까지 눈부셨지만, 그 이후 침체기를 맞이했다. 1990년 서독과 동독의 통일 후 독일은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는 핵심 지지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노동 개혁인 ‘하르츠 개혁’을 강행했다. 꾸준히 치솟던 실업률과 노동 시장의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노동 유연성 확보를 위해 임시직을 늘리고, 실업 급여를 강화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슈뢰더 총리는 2005년 조기총선에서 패배했지만, 하르츠 개혁의 효과는 2006년부터 수치로 증명됐다. 2006년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3.7%로, 2000년대 들어 처음으로 OECD 회원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을 넘었다.

1990년대 독일 축구도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독일 축구팀은 8강 진출에 그쳤다. 통일 전 서독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승, 1982·86년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했던 것에 비하면 몹시 부진한 성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2000년대 독일 정부와 독일축구협회(DFB)는 특단의 개혁을 단행했다.

독일축구협회는 2002년 유소년 선수 양성계획을 발표했다. 1군 프로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 소속 클럽이 팀과 연계된 유소년클럽을 의무적으로 양성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유소년 출신 선수에게 분데스리가의 출전 기회를 더 많이 부여하자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실력 있는 선수라면 국적이나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유소년 클럽에 영입하는 것이 당시 방침이었다. 팀가이스트에서 강조하는 사회 통합과 화합의 정신을 다시금 다지는 계기였다. 메수트 외질, 사미 케디라 등이 이 시기 양성돼 ‘다문화 대표팀’을 이끌었다.

이런 과감한 개혁을 거친 독일 대표팀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24년 만에 다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3│분열로 스타 선수 외질 잃어

작년 독일 국가대표팀을 은퇴한 외질 사태는 새로운 것에 대한 포용력과 문제를 해결하는 위기관리능력의 부재를 보여준 독일의 단면이다.

독일 대표팀에서 92경기를 뛴 스타 플레이어 외질은 2018년 7월 인종차별을 이유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독일과 터키 이중국적자였던 그는 지난 2007년 터키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 대표팀을 선택했다. 그랬던 외질은 지난해 5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함께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찬밥 신세가 됐다. 독일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독재자’로 비판하는 정서가 강하다. 게다가 터키 정부가 독일 기자를 구금하면서 두 나라 사이는 당시 몹시 악화된 상황이었고, 반(反)이민자 정서로 극우정당이 득세해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웠다.

결국 독일 축구 관계자들과 여론은 일제히 외질을 비판했다. 울리 회네스 바이에른 뮌헨 회장은 외질을 향해 “몇 년째 축구를 거지같이 했다”고 말했고, 유명 언론인은 “외질은 더 이상 독일 소속이 아니다”라며 대표팀 퇴출을 요구했다. 독일 관중은 그가 경기장에 오르면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독일축구협회는 ‘선 긋기’에 급급했다. 라인하르트 그린델 독일축구협회장은 트위터에 “우리 선수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자처했다”는 내용을 올렸다가 삭제했다. 대표팀의 팀가이스트가 분열됐고,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은 한국에 0 대 2로, 멕시코에 0 대 1로 지면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은 또다시 외질에게 향했다.

침묵하던 외질은 결국 “독일축구협회가 보기에 나는 이길 때만 독일인, 졌을 때는 이민자”라며 독일축구협회 회장단을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했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다양한 이민자 출신과 한데 어울려 힘을 합치는 팀가이스트의 빛이 바랜 것이다. 카타리나 발리 독일 법무장관은 “성공적인 축구 선수가 돌연 은퇴한 사건은 독일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아 기자, 정예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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