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에서 김동연 경제부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구윤철 예산실장(오른쪽에서 첫 번째)이 2019년 예산안 및 국가재정 운용계획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8월 24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에서 김동연 경제부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구윤철 예산실장(오른쪽에서 첫 번째)이 2019년 예산안 및 국가재정 운용계획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8월 24일 오전 10시 34분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브리핑실에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입장했다. 2019년 예산안과 국가재정 운용계획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한 김 부총리의 얼굴은 창백했다. 김 부총리가 숨 돌리는 사이 한 뼘 두께의 자료가 기자들에게 배포됐다. 브리핑은 예정 시간을 20분가량 넘긴 후에야 시작됐다. “내년 예산안은 대폭 편성 확대했습니다.” 김 부총리는 긴장한 탓인지 첫 문장부터 주요 단어를 뒤집어 읽었다.

내년도 예산은 올해보다 41조원가량 늘어난 470조5000억원. 숫자가 공개되자 브리핑실이 술렁였다. 예산안 연간 증가율(9.7%)로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10년 만에 가장 컸고, 내년 경상성장률(실질성장률+물가상승률)인 4.4%를 두 배 이상 웃돌았다. 보육 지원 등 복지 관련 예산은 지난해보다 17조6000억원(12.1%)이 늘어난 162조원을 기록했다. 반대로 연구·개발(R&D) 예산은 7000억원 늘어난 20조4000억원으로 증가율이 경상성장률보다도 낮은 3.5%에 그쳤다.

R&D 예산 증가폭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지적에 김 부총리는 “20조원이 적은 돈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브리핑실 한쪽에서 “예산실이 청와대가 달라는 대로 재정을 다 퍼줬다”고 수군댔다. 나흘 후인 28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2019년 예산안’을 확정했다. 공무원들은 “기재부 예산실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가 총괄하는 비서실 정부

예산안이 편성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각 부처가 1월 31일까지 기획재정부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면, 이 자료를 토대로 기재부 예산실에서 각 부처의 부처별 지출 한도와 예산안 지침을 정한다. 각 부처는 이 지침을 바탕으로 예산 요구서를 작성해 6월 30일까지 기재부에 다시 제출하고, 기재부는 이 요구서를 검토해 얼마나 예산을 편성할지를 9월까지 정하게 된다.

예산실의 역할은 불필요한 부분을 최대한 걸러내 정부 재정을 살뜰하게 꾸리는 것이다. 매년 예산철, 기재부 3층 예산실 주변은 더 많은 예산을 받기 위한 수많은 부처·공공기관 관계자로 북적대고, 예산실장의 성과는 자신이 근무했던 해의 예산을 얼마나 많이 깎아냈는지로 평가받는다. 즉, 올해의 예산실장은 국고를 낭비한, 세금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한 무능한 관료로 역사에 남게 되는 셈이다.

정부 예산 편성은 기재부의 고유 권한으로 외부에서 개입할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청와대 정부’, 문재인 정부를 묘사하는 단어다. 청와대 비서실이 모든 국정을 조정하고 지휘해 정부 역할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청와대 정부의 ‘예산 건드리기’는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과 동시에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첫 청와대 직제 개편에서 장관급인 정책실장을 부활시키고, 당시 장하성 고려대 교수를 임명했다. 정책실 산하에는 경제수석·사회수석과 별도로 일자리수석과 차관급인 경제보좌관 및 과학기술보좌관을 뒀고, 재정기획관을 신설했다.

재정기획관은 국가 재원 배분을 기획하고 점검하는 역할로, 청와대가 정부의 예산 편성 과정 전반을 관리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재정기획관으로는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국회예산정책처 경제분석실장을 거친 학자 출신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을 임명했다.


세제 등 개혁 위해 친위 조직 만든 청와대

올해 들어 청와대는 더 노골적으로 예산에 간여했다. 예산안 편성 발표 일주일 전인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수석비서관실 회의에서 “올해와 내년도 세수 전망이 좋다.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달라”고 당부했다. 이틀 후인 19일 오전 국회서 열린 ‘고용 상황 관련 긴급 당·정·청 회의’에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청년, 노인, 저소득층의 소득을 확대하고 가계 지출을 줄여주는 방향으로 예산을 편성하겠다. 정부를 믿고 기다려달라”며 확대 재정을 약속했다. 이 자리에서 김태년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정부가 2019년도 일자리 예산을 올해보다 12.6% 늘려 편성하기로 했다”고 확인했다.

예산안 발표를 하루 앞둔 23일 김동연 부총리는 국회에서 열린 당정 협의에서 2019년도 예산안에 일자리 창출 등 예산을 역대 최고 수준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올 초에는 청와대 산하,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 ‘조세재정개혁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재정특위는 명목상으로는 자문기구지만 청와대가 세제와 예산 개혁을 위해 직접 만든 친위(親衛) 조직이다. 이는 청와대가 예산을 넘어 조세정책에 직접 간여하겠다는 뜻이다. 위원장은 참여연대 출신인 강병구 인하대 교수가 맡았다. 정부에서 세제와 예산을 책임지는 기재부 인사는 세제실장 한 명만 뒀다.

야당 측 인사는 “강병구 위원장을 포함해 재정특위의 다수 위원이 좌파 성향 시민단체나 교수 출신”이라며 “기획재정부의 입김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강 위원장과 위원으로 활동 중인 구재이 굿택스 대표는 참여연대, 박훈 서울시립대 교수와 김유찬 홍익대 교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이다.

청와대는 예산과 재정정책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촉수를 뻗고 있다. 7월 26일 발표한 2기 대통령 비서실 조직개편안에서는 일자리수석 밑에 자영업 비서관을 신설했다. 이미 내각에 자영업 문제를 담당하는 중소기업벤처부가 있는데도, 자영업 정책을 총괄하는 조직을 새로 만든 것이다. 소상공인들을 만나는 등 관련 이슈를 챙겨왔던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머쓱하게 됐다.

청와대가 정책형성과 추진과정을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장관들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장관은 물론이고 이낙연 국무총리의 존재감도 희미하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이낙연 총리에게 책임총리 역할을 주문했지만, 정작 주요 현안에서 총리의 존재감은 없고 청와대 실장들만 부각된다”고 설명했다.


plus point

대통령 설득하고 담판짓던 옛 관료들

한국 경제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역대 경제부총리들의 무용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1960~1980년 산업화 시대에도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했다. 하지만 그 시대 관료는 옳다고 생각하면 대통령을 설득하고 담판을 지었다. 이는 대통령의 포용적 리더십과 전폭적인 지지, 권한 위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러 말 할 거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재익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을 본인의 첫 경제수석으로 임명하면서 한 말이다. 군 출신으로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전 전 대통령이 경제수석에 전폭적인 힘을 실어줬다. 김재익 국장은 전 대통령에게 ‘경제는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경제 원리를 가르쳤고 국가가 흑자를 내기 위해서 고통을 참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박정희 정부 때 조선일보 경제기획원·재무부 출입기자였던 송형목 전 스포츠조선 사장은 “남덕우 부총리는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일주일에 반드시 한 번씩 자필로 편지를 써 보냈다”고 말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업적으로 포항제철 건립이 꼽힌다. 김 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종합제철 TF팀을 만들어 명동 YWCA건물에 사무실을 차리고 “이 일이 잘 안되면 모두 한강에 가서 빠져 죽어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TF팀은 한 달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외국 책을 갖다 놓고 최신 제철공장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철이 만들어져 나오는지부터 공부했다. 1969년 일본 통산성 국장이 포항제철 현지조사차 한국에 왔을 때 김 부총리 자신이 직접 만나 담판을 지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학렬 부총리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명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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