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페어 테라퓨틱스
사진 페어 테라퓨틱스

일반적으로 ‘약’이라고 하면 먹는 알약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한국인에게 ‘약을 먹는다’와 ‘약을 본다’ 둘 중 어색한 것을 고르라고 물어본다면 큰 고민 없이 후자를 고를 것이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는 ‘약을 본다’라는 말이 꽤 자연스럽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디지털 치료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약물은 아니지만, 의약품과 같이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다른 말로는 ‘디지털 테라퓨틱스(Digital Therapeutics)’로도 불리는데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게임, 애플리케이션(앱) 등을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고도화된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를 뜻한다.

국내의 경우 디지털 치료제는 식품의약품안전처 인허가 분류 체계상 의약품이 아닌 의료기기로 분류된다. 기존 의약품과 유사한 치료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 기존 의약품처럼 임상시험을 통해 치료 효과를 검증받고 규제 기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약품에 가깝지만, 의료기기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치료제는 2013년 ‘국제 의료기기 규제 당국자 포럼(IMDRF)’에서 처음 정식 의료 서비스로 제도적으로 정의됐다. 디지털 치료제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체내 화학반응을 수반하지 않아 독성 및 부작용이 없고 개발 비용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특히 뇌신경질환, 정신건강질환, 약물 중독과 같은 분야에서 활발히 개발 중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19년 디지털 헬스 소프트웨어 사전 인증 프로그램(Digital Health Software Pre-certification Program)을 통해 디지털 치료제의 등록과 시행 절차를 간소화한 바 있다. 소프트웨어 기술이 급성장하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언택트(un-tact)’가 중요해지면서,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커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에서 2020년 8월 치매, 알코올 중독,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와 관련해 ‘디지털 치료기기’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세계 1호 디지털 치료제 ‘리셋’

세계 최초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한 기업인 미국의 ‘페어 테라퓨틱스(Pear Therapeu-tics)’에 대해 알아보자. 2013년 미국 보스턴에서 설립된 페어 테라퓨틱스는 디지털 치료제 1호 기업이다. 소프트웨어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듣는다. 이 회사는 현재 미국 FDA가 승인한 디지털 치료제 3종을 보유하고 있다. 페어 테라퓨틱스의 첫 FDA 승인 디지털 치료제는 리셋(reSET)이다. 리셋은 물질 사용 장애(SUD⋅Sub-stance Use Disorder)를 치료하는 스마트폰 앱이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물질 사용 장애는 알코올, 마약, 진정제, 담배와 같은 물질을 중독적으로 사용하고, 이로 인해 일상생활의 지장을 경험하는 장애를 말한다.

페어 테라퓨틱스는 리셋과 약물 치료를 병행한 환자 집단이 약물 치료만 실시한 환자들에 비해 물질 사용 장애 치료효과가 22.7% 높다는 임상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2017년 9월, 디지털 치료제로는 세계 최초로 미국 FDA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리셋을 처방받은 환자(18세 이상)에게는 플랫폼상에서 치료 과정에 대한 안내와 함께 앱에 대한 진입 코드가 주어진다. 환자는 12주로 구성된 (기존에 진행해오던 약물 치료와 병행하며) 프로그램을 따라 충동 대처법 등의 온라인 강의를 듣고, 주 4회 강의 내용에 대한 퀴즈에 답을 해야 한다. 본인의 약물 사용, 갈망 등에 대한 설문도 병행된다. 치료 기간에 환자가 달성한 성과에 따라 보상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포함돼 있어 환자가 흥미를 가지고 치료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환자는 약물 처방을 토대로 단순히 의약품을 섭취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리셋 앱을 통해 자신의 질환에 대해 배우고 익히고 보상을 받으며 치료 과정 전체를 적극적으로 모니터링하게 된다. 치료 기간 중의 기록은 데이터화되고 담당 의료진은 치료 경과를 지속적으로 지켜볼 수 있다.


세계 최초 디지털 치료제 ‘리셋’을 개발한 페어 테라퓨틱스. 사진 페어 테라퓨틱스
세계 최초 디지털 치료제 ‘리셋’을 개발한 페어 테라퓨틱스. 사진 페어 테라퓨틱스

창업 8년 만에 나스닥 상장 발표

페어 테라퓨틱스는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 출신의 코리 맥칸, 하버드대 출신 변호사 스테판 스미스,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 교수이자 의사인 윌리엄 그린이 2013년에 공동으로 창업한 회사다.

하버드대에서 분자생물학을 연구했던 코리 맥칸은 박사 과정을 마친 후 맥킨지에서 바이오 기업들에 자문을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 치료제가 화학 약물 치료제 대비 임상 효과는 더 좋고 개발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창업을 결심했다.

올해로 창업 8년째인 이 회사는 다양한 분야에서 디지털 치료제 개발 성과를 내고 있다. 페어 테라퓨틱스는 리셋의 성공 이후 아편류 사용 장애(OUD⋅Opioid Use Disorder) 치료 앱인 리셋오(reSET-O)와 만성 불면증 치료 앱 솜리스트(Somryst)를 개발했다. 리셋오는 2018년 12월, 솜리스트는 2020년 3월에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았다. 현재 테라퓨틱스는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만성 편두통 등으로 치료 범주를 확대, 10종류 이상의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페어 테라퓨틱스가 만든 디지털 치료제가 연이어 FDA 승인을 받자, 많은 벤처 투자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Softbank Vision Fund), 싱가포르의 국부펀드 테마섹(Temasek)을 포함해 23곳의 투자기관으로부터 총 8차례에 걸쳐, 누적 3억9600만달러(약 4800억원)를 투자금으로 유치했다.

2021년 6월에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와 합병을 통해 미국 나스닥 시장 상장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페어 테라퓨틱스는 16억달러(약 1조9300억원)의 기업가치로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하겠다고 발표했다.

현대 약학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목표를 가지고 빠르게 시장에 진입한 페어 테라퓨틱스가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 우리나라와 다른 글로벌 시장이 어떻게 성장하며 어떠한 기업들이 출현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자.

박순우 메인스트리트인베스트먼트 대표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